황실 컬렉션은 1924년 마지막 황제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날때까지 그의 손에 있었다. 이듬해 베이징에 고궁 박물원이 설립되었고, 천 년 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컬렉션이 마침내 전시되었다. 그러나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자 컬렉션은 안전을 위해 2만 개의 나무 상자에 담겨서 상하이로 보내졌다. 그 다음에는 난징의 창고에 보관되었다가, 1937년 일본군이 남쪽의 그 수도마저 점령할 위기에 처하자 상자들은 배에 실려 양쯔강 상류로,
기차에 실려 친링산맥 너머로, 트럭에 실려 한중으로 보내졌다. 선박이 침몰하고 건물이 폭파되는 등 제임스 본드 영화에 나와도 될법한 사건들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컬렉션은 단 한 점도 다치지 않고 모두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컬렉션은 여태 상자에 담긴 채 난징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1947년 공산당이 난징에 바싹 다가오자,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도망치면서 그중 최고의 작품들을 챙겨 간 뒤 타이베이 산허리를 파낸 터널에 보관했다.
이후 작품들은 그곳에 죽 갇혀 있었다. 딱 한 해만은 예외였는데, 1961년 봄부터 일 년간 약 200점의 그림과 유물이 범관의 「계산행려도」와 곽희의 「조춘도」도 포함되었다 미국에서 열린 「중국미술의 보물들」 순회 전시회에 나선 것이었다. 퐁은 <중국 미술에 대한 현대 서양의 연구는 오직 그 전시 하나로부터 탄생했다고 말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인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전시를 보고 퐁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만일 우주선 하나에 담을수 있는 만큼만 남기고 지구를 통째 파괴해야 한다면, 이 그림들 중몇 점도 그 우주선에 들어가야 할 겁니다.> 4년 뒤, 장제스는 마침내 타이베이에 새 고궁 박물원을 열었다. 그는 비록 중국의 위대한 도시들과 인구와 땅을 잃었지만, 황실 컬렉션이라는 위대한 보물 하나만큼은 간직했다. - P270

이 컬렉션은 타이완 내에서도 여행하지 않는다. 최고의 작품들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한 결정이 중국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 475점을 보내기로 했다-- 사람들의 화를 그토록 부추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메트 대여가 예정된 품목 중에는 고궁 박물원이 컬렉션에서도 특히 귀한 작품만을 엄선하여 작성한 <제한 목록>에 포함된 것도 27점 있었는데, 이 목록에 포함된 작품들은 보통 매 3년마다 40일씩만 전시된다. 미국 사람들에게 박물관은 주로 대중을 위해서 전시를 여는 교육 기관이지만, 중국 사람들에게박물관은 문화적 보물을 안전하게 지키는 창고다. 중국의 미술 애호가들도 물론 감상을 즐기지만, 그림의 아름다움은 역사적 가치에 비해서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범관의 그림을 해외로 보낸다는 것은 말하자면 미국이 독립 선언문이나 헌법 원본을 해외에 빌려주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 P271

고궁박물원의 작품 안내문에 적힌 작가명, 제작 연도 등은 18세기에 작성된 내용이다. 이후 연구에서 그중 많은 내용이 부정확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박물원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타이완의 한 예술학자는 내게 말했다. 작품 귀속을 바꾸기 시작하면, 컬렉션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비난이 쏟아질 테니까요. 어떤 작품이 실은 범관의 작품이 아니라고 선언한다면, 입법원이 얼마나 히스테리를 부릴지 상상해 보세요!」 박물원 학자들은 그 대신 은밀한 방식으로 귀속을 바로잡는다. 가령 중국에서는 중요한 그림일 경우 가을에 전시하는 전통이 있는데, 따라서 만일 당신이 봄에 범관을 본다면 박물원 측이 실은 그 작품을 범관의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특징적양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라는 문구도 재귀속을 암시한다.  - P272

타이완에서는 1949년 장제스와 함께 건너온 사람들과 그 후손들로 인구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외성인>들(<1949년 사람들>이라고도 부른다)과 그보다 훨씬 더 전에 그곳으로 건너온 선조를 둔 <본성인>들 사이에 알력이 심하다. 두 집단 모두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본토에서 비롯한 같은 한족이기 때문에, 이 긴장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한편 타이완섬의 토착 원주민 인구는 아주적다. 그러나 장제스 세력이 정복자의 분위기로 건너왔고, 1949년부터 잔인한 <장 왕조가 끝난 1987년까지 본토에서 건너온 국민당이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본성인들은 더 많은 토지와 부를 갖고 있는데도 하층 계급 취급을 당했다.
자신들이 계속 중국 본토까지 다스린다고 주장하면서 입법원에 본토의 모든 구역들에 해당하는 대표자를 두었던 장제스 정부는 부패 정부였다. 그러나 지난 9년 동안 타이완은 놀라운 유연성을 발휘하여 제대로 기능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변신했고, 이제 교육수준이 높은 인구(문해율이 90퍼센트가 넘는데 문자 언어에서는 놀라운 수준이다)와 막대한 국가자산(세계에서 1인당 현금 보유량이 가장 큰 나라에 속한다)과 개방적인 선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입법원은 이제 자신들이 중국 전체를 대변한다고 공언하지 않는다. - P283

고궁 박물원을 보완할 타이완만의 장소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타이완인으로 정체화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우리는 위대한 중국 문화의 일부라고 가르치지만, 사실 나는 그 문화에 진정으로 소속되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의식을 고취시켜야 하고, 그들이 본토로부터 문화적 자유를 추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천이 이처럼 지금 논의하는다른 주제를 그보다 더 근본적인 독립의 문제와 연결 지어 이야기하는 것은 타이완의 긴장된 정치 상황 탓에 여기서는 어디서나 전형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타이완 지도부는 본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는 창의적으로 애매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고말합니다만, 베이징을 헷갈리게 하려는 그 애매함이 실상 적들보다는 타이완 국민들을 더 헷갈리게 만듭니다. 중국이 무력을 쓴다면, 우리는 반격할 겁니다. 우리는 중국의 경제 지구들을 신속하게 파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본토의 군사 전문가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방식으로는 이길 수 없겠지만, 우리 무력으로써 본토 경제학자들에게 두려움을 심는다면 그곳 지도부가 분열되도록 만들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계획을 본토에 똑똑히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기르는 것도 이런 정책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고궁 박물원은 이 목적을 떠맡지 못합니다.」 - P284

어느 겨울날 저녁, 퐁은 내게 말했다. 「지금 중국에 고급 중국 문화가 얼마나 있습니까? 전부 서양 문화뿐이죠 중국인들은 지난 150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잊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아직까지 살아남은 것들을 너무나 귀하게 여기게 되었지만, 자신의 유산을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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