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있는 한, 그녀도 이 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리 와" 그녀는 팔을 벌렸다. 아이가 그녀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힘에 떠밀려 그녀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지하실의 희끄무레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지금 아이는 분명한 형체를 가지고 체온과 살갗의 촉감이확연히 느껴지게 되었다. 더 커지고, 더 무거워지고, 더 뚜렷해졌다. 그녀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엄마하고 둘이 살자" 그녀가 하얀 그림자 아이를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 "엄마하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 속삭이며 그녀는 아이의 희끄무레한 이마에 입 맞추었다. 어두운 콘크리트 건물의 검은 지하실에서 오랫동안 엄마를 기다렸던 조그만 아이의 흔적이 드디어 찾아낸 그녀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 P290
아이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자기 나름대로 파악한다. 어린아이의 지각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에 대한 세상의 호의와 인간의 신뢰 여부를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한다. 왕자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친절하고 예의 바르지만 진심이 없는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왕자가 아는 한, 그것은 세상과 인간의 기본적인 특성이었다. - P295
밝은 미래 따위는 믿지 않았다. 먹고살 수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언제나 지금보다는 조금전이 가장 좋은 순간이었고, 앞날보다는 지금이 가장 좋은순간이었다. 돌아가면 아마도 여기서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느릿하게 저물어가는 햇살을 즐기며 시간을 낭비하던 때가그리워질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 애썼다. - P332
내 부모가 자식의 삶을 파괴하고 미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무리하게 확장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이러한 강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워줬으니 감사하라는 말 앞에는,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아마 그들에게는 진심일 것이다. 내 부모와 그들의 부모 세대, 한국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세대에게 가장 큰 화두는 언제나, 2차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생존이기 때문이다.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문제다. - P348
좋은 시간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으나 나쁜 시간을 소원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래는 없었다. 그와 내가알았던 모든 삶의 유형들은 전부 과거에 갇혀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 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순간은 짧지만,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생존을 그저 무의미하게반복해서 확인하는 동안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손가락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에 고정되어버린 사람들, 그도,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나도, 살아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사실은 모두 과거의 유령에 불과했다.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나는 아주 조금만 행복해지고 싶어 너무 많이 행복해지면 슬픔이 그리워질 테니까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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