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녀에게 독을 먹인 것 같았다. 침대에 앉아있다 보니 몸속에서 급류가 맹렬하게 흐르는 감각이 점점 더 부자연스럽게 의식되었다. 위장 속에서 액체가 출렁거리고, 귀에 혈류가 고동치는 소리까지 느껴졌다. 별수 없이 침대가 기울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을 감수하고 조심스럽게 몸을 뉘였지만, 어떤 자세를 취해도 편안하지 않았다. 안정이 되지 않았다. 그녀 자신에게서 벗어날 가망이없었다. 눈을 감으니 미래파 화가의 그림 같은 악몽이 펼쳐졌다. 강렬한 빛깔의 뱀과 사다리들, 잉크로 그려 넣은 심장, 히죽 웃는 레너드의 붉은 얼굴이 보였다.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보인 것은 가터벨트의 걸쇠를 더듬어 찾는 릴리안의 모습이었다. 실크 스타킹이 끌려 내려가는 광경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 P209
녹색 술병을 떠올리자마자 목구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그런데그 맛은 진과 레모네이드였다. 진과 레모네이드. 그리고 검은 담배.
그걸 시작으로, 바버 부부의 방에서 보낸 지난밤의 기억들이 서서히연이어 떠올랐다. 탁한 물속에서 퉁퉁 불어터진 시체들이 떠오르듯이 서서히 그러나 가차없이. 자신이 한 손에 술잔을, 다른 손에는 담배를 들고서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았던 것이 기억났다. 바버 씨의 담배 상자에 손을 뻗다 말고 새침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사실상 속눈썹을 파닥거리다시피 하며, "당신은 여자들이 담배 피우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요."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났다. 「메에 메에 검은 양」을 목청껏 불렀던 것도, 키득거렸던 것도, 고함을 쳤던 것도, 그리고....
‘아니야. 인정 못 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러나 가장 흉측하게 불어터진 시체가 떠오르고야 말았다.... 릴리안이 쿠션 위에 올라서서 비틀비틀 스트립쇼를 하고, 프랜시스 자신은 술취한 군인처럼 음흉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던 기억이.
프랜시스는 이부자리에 얼굴을 파묻고 메스꺼움과 수치심을 억눌렀다. -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