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의마지막 부분은 「패전계」로 적의 힘이 강하고 나의 힘은 약할 때의 방책이 담겨 있다. 서른여섯 개 계책 중에 서른여섯번째, 즉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走爲上‘으로,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흔히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온 것이다. 근대 이후로 인간은 자연과 세계를 개조하고 통제하며 발전해왔고,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자기계발서들은 우리에게 주변의 문제들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고대의 지혜에 끌린다.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알 것이다. - P67
리베카 솔닛은 걷기와 방랑벽에 대한 에세이"에서 고대그리스의 소피스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생각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방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철학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들, 이를테면 사상은 옥수수 같은 곡물과 달리 안정적인 수확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모두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한곳에 머물기 어렵다는 것. 인맥이나 터전에 얽매인 직업, 대표적으로 정치인이나 농민과는다르다고 말한다. -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