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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치 황금 나리꽃"
군벌 장군의 첩
(1909-1933)
열다섯 살에 외할머니는 군벌 장군의 첩이 되었다. 그 장군은 허약한 중국 정부의 경찰총감이었다. 1924년 당시 중국은 혼돈에 빠져 있었다. 외할머니가 살던 만주를 포함하여 중국의 대부분이 군벌의 통치하에 있었다. 외할머니를 장군의 첩으로 들여보낸 사람은 만리장성에서 북쪽으로 약 160킬로미터, 베이징에서 북동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만주 남서부의 지방 도시 이셴의 경찰관이었던 외증조할아버지였다. - P39
하지만 외할머니의 가장 큰 자산은 중국말로 "세 치 황금 나리꽃三寸"이라고 불리던 전족)이었다. 이런 작은 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국 여성 감식가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외할머니가 "미풍에 흔들리는 연약한 어린 버드나무 가지처럼" 걷는다는 의미였다. 여인이 전족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남자들을 성적으로자극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녀의 무방비성이 보는 사람에게 보호본능을 유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외할머니의 발은 두 살 때 천으로 단단히 묶여졌다. 자신도 전족을 한 외증조할머니가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모든 발가락을 안으로 구부려서 발바닥 밑으로 밀어넣은 채 6미터 정도의 하얀 천으로 발을 감았던 것이다. 그런 다음 아치형 뼈를 부수기 위해서 그 꼭대기에 커다란 돌을 올려놓았다. 외할머니는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어머니(외증조할머니)에게 제발 그만 하라고 애원했다. 외증조할머니는 외할머니가 고함을 지르지 못하도록 외할머니의 입에 천을 물렸다. 외할머니는 고통에 못 이겨 여러 차례 기절했다.
이런 과정은 몇 년 동안 지속되었다. 뼈가 다 부러진 후에도 밤낮없이 발을 두꺼운 천으로 단단히 묶고 있어야 했다. 풀어놓는 순간발이 원상으로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몇 해 동안 외할머니는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살았다. 외할머니가 발을 풀어달라고 애원할라치면 외증조할머니는 울면서 전족을 하지 않은 발이 네 일생을 망칠 거라고, 네 장래 행복을 위해서 이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 P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