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benevolentia)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명료한 지적이지만,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도 든다. 스피노자의 정의를 따르면,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박애의 감정은 생길 여지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다행히 스피노자는 우리의 이런 궁금증을 미리 짐작하고있었다. "자신과 유사한 어떤 것이 어떤 정서에 자극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과 유사한 정서에 의해 자극된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다. 사회적으로 천대받아 얼어 가던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장 발장에게 부모를 잃고 오갈데가 없어진 코제트는 ‘자신과 유사한‘ 존재였다. 그러니 코제트의 비참은 바로 장 발장의 내면에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던 비참의 느낌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배고픔을 겪어 본 사람만이 자신과 유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 밥을 나누어줄 수 있고, 가혹한 추위 속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사람만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옷을 벗어 줄 수 있는 법이다. - P121
사랑은 함께 있을 때는 기쁨을, 반대로 떨어져 있을 때는 슬픔을 가져다주는 감정이다. 이에 반해 연민은 남의 불행을 먹고사는 서글픈 감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연민의 감정은 씻은 듯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결과론적 이야기이지만, 결국 연민을 계속 품고 있으려는 사람은 상대방이 계속 불행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연민의 감정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연민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잿빛 아우라가 퍼져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연민(commiseratio)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한마디로 연민이라는 감정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간단히 정의한 것처럼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은 극복하고 기쁨은 회복하려고 한다.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도 슬픔은 슬픔이다. 그러니 어떻게 극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호프밀러라는 젊은 장교가 계속 에디트라는 불행한 여인을 찾아가는 이유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연민은 결코 사랑으로 바뀔 수 없다. 왜 그럴까?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 P130
"연민이라는 것은 양날을 가졌답니다. 연민을 잘 다루지 못하겠으면 거기서 손을 떼고, 특히 마음을 떼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치료도 되지만 그 양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거나 제때 중단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처음 몇 번 맞을 때에는 마음이 진정되고 통증도 없애 주죠. 그렇지만 우리의 신체나 정신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답니다. 신경이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찾게 되는 것처럼 감정은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됩니다. (••••••) 소위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연민은 무관심보다도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 의사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판사나 법 집행관, 전당포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연민에 굴복한다면 이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연민이라는 거. 아주 위험한 겁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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