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시피 이곳은 동쪽, 곧 바다 쪽에 이 산맥이 솟아 있기 때문에 이곳을 통해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사람들은북쪽이나 남쪽으로(이 대목에서 선생님은 지휘봉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움직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우회해 지나가 버린다. 이런 이유에서 이곳은 영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그런대로 아름다운 구석인 셈이다. 동시에 ‘분실물 보관소같은 곳인 셈이지."
••••••
내 말이 얼토당토않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시기의 우리에게 헤일셤 너머의 장소는 어디가 되었든 간에 환상 속의 세계와 흡사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외부 세상에 대해, 그곳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지에 대해 당시 우리는 극히 막연한 개념만을 갖고 있었을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퍽에 대한 개념을 꼼꼼히 점검해볼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도버 회복 센터의 타일 벽으로 된 병실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루스가 말한 것처럼 당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혹시 귀중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해도, 애써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해도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어른이 되어 자유롭게 전국을 여행할 수 있게 되면 노퍽에 가서 그것을찾을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는 사실"
이었다. - P121

어쨌든 이런 이유에서 나는 그 테이프에 대해 몹시 은밀한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는 플라스틱 케이스를 열어야만 담배 피우는 주디의 사진이 보이게 커버를 안쪽으로 돌려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게 그 테이프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은 담배 때문도, 주디 브리지워터가(그 무렵에유행한 칵테일 바 스타일의 가수로 헤일셤에서 인기 있는 부류는 아니었다.) 노래를 잘 불러서도 아니었다. 내가 그 테이프를 그렇게 특별하게 여긴 것은 거기에 수록된 노래 때문이었다. 셋째 트랙에 담긴 그 노래의 제목은 「네버 렛 미 고」였다. - P127

 어쨌든 나는 가슴에 아기를 안고 있다고 상상하며 그 노래에 맞추어 천천히몸을 흔들고 있었다. 실제로 상황이 더욱 곤혹스러웠던 것은 당시에 내가 아기 대신 베개를 끌어안고 두 눈을 꼭 감은 채 느릿하게 춤을 추면서 그 구절이 나올 때마다 나직하게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 베이비, 베이비, 네버 렛 미 고••••••."
노래가 거의 끝날 즈음 나는 무엇 때문인지 방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퍼뜩 눈을 떴다. ‘마담‘이 문간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충격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다음 순간 새로운 종류의 경계심이 나를 엄습했다. 그 상황에는 뭔가 기묘한 점이있었기 때문이다.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지만(자고 있을 때가 아니라면 문을 완전히 닫지 않는다는 규칙 같은 것이 있었다.) 마담은 바로 문턱에 서 있지 않았다. 그녀는 복도에 조용히 서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방 안에서 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녀가 울고 있다는것이었다. 어쩌면 음악을 뚫고 들려온 그 흐느낌 소리에 내가 몽상에서 깨어난 것인지도 몰랐다. - P130

"다른 누군가가 너희한테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해 주마. 전에 말한 것처럼 문제는 너희가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거야. 너희는 사태가 어떻게 될 건지 듣긴 했지만, 아무도 진짜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감히 말하건대 사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무척 만족하는 이들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 중 아무도 미국에 갈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하는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얼마안 있어 헤일셤을 떠나야 하고, 머지않아 첫 기증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해.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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