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은 항상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나를 소개하려고 노력하는데, 문제는 가끔 그가 없을 때 (내가 접시를 치우거나 장작을 채워 넣는 걸보며) 내가 고용된 일꾼인 줄 알고 얕잡아 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것이다.
어떤 해에는, 내가 난로에 장작을 넣고 있는데 작가들의 쉼터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공짜 와인과 공짜 바닷가재를 먹고 있던 아주 유명한 신문 칼럼니스트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고는, 테이블 위에 있던 빈 설탕 통을 가리키며 나에게 "설탕!"이라고 소리친 적도 있다.
이런 방문자는 내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그것보다 더 심한 부류는, 그 집이 내 집이라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부엌이나작가들의 쉼터에서 마리아를 돕는 사람들이나 니키, 플로, 또는 베선 을대하는 태도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돌변하는 사람들이다. 나도 손님들을 별로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들보다 크게 나은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한 번도 종업원들이나 청소부 혹은 가게 점원들에게 무례하게 대한 적이 없고, 또 이제까지 내가 누군가를사회적 약자처럼 취급한 적이 없었기를 바란다. 대신 나에게 무례하게대한 사람에게는 똑같이 예의 없게 행동한 적은 있다. 그나마 나는 무례한 손님들에게 똑같이 갚아 줄 여유라도 있지만(이건 내 서점이고, 아무도 날 해고할 수 없으니까) 서점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나와 같은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걸 악용해서 눈곱만큼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 위인들을 보면 정말 화가 난다. 물론 나도 손님의 외양을 관찰하는편이긴 하지만 그건 그저 관찰일 뿐이지 판단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 P312

‘무례하기 굴긴 싫지만...‘ 하는 식으로 말문을 여는 것은 ‘난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이라고 시작하는 말과 똑같은 경계경보를울린다. 복잡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 무례하게 굴기 싫으면 무례하게 굴지 않으면 된다.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면, 인종 차별주의자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된다. - P317

11시에 십 대 남자아이가 어색해하며 쭈뼛쭈뼛 계산대로 걸어오더니 내 앞에 ‘호밀밭의 파수꾼』과 책값으로 2.50파운드어치 잔돈을 함께 내밀었다. 내가 이 아이만 했을 때, 성인으로 성장해 가던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이 책만큼 내게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많지 않다. 주변 사람들이 강요하는 인생과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라는인물에 대한 샐린저의 묘사는 1951년에 이 책이 나온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십대 청소년 독자에게 무수한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 P359

한 손님이 4시쯤 조제 사라마구의 놀라운 책 ‘눈먼 자들의 도시』와 안토니오 타부키의 「페레이라가 주장하다』 한 권이 포함된 한 상자분량의 현대 소설 페이퍼백을 가져왔다. 이 두 소설은 이탈리아인 친구가 현대 유럽 소설에 너무 무지한 나에게 경악하며 보내 줬던 책이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정말이지 대단한 소설이었다. 이 책처럼 몰입도가 높고 내용을선명하게 시각화시키는(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은 많지 않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추잡하고 무기력하게 변해 버린 세상, 한가지 감각의 상실로 인해 드러나는 사회계약의 허망함과 급속히 붕괴되는 사회의 모습을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 냄으로써 독자들을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라 그 세상의 일원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고, 결말에 가서는(호그의 사면된 죄인의 사적인 고백과 기록에서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 P365

그중에서도 크리스마스와 하그머네이 사이의 일주일은 확실하게 문을 열 가치가 있는 기간이다. 이때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고향으로 온다. 그리고 금세 가족들과 같은 집에서 몇 날 며칠을 같이 지낼 때보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더 깊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감정이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기간에는 일년 중 가장 어두컴컴한 달에 좁은 공간에서 가족들과 줄곧 지내다가 뛰쳐나온 사람들로 서점이 북적거린다. 어떻게든 탈출할 구실을 찾아 밖에 나온 사람들은 서점으로 몰려와 책을 뒤적이며몇 시간씩 시간을 보내다가, 대개는 책을 사 간다. - P371

오늘 온 손님 중 한 명은 나이 든 남자였는데, 뭔가 굉장히 신난 표정으로 책 한 권을 움켜쥐고 계산대로 왔다. "이 책 얼마면 되겠소?" 그건 라틴어 학교 교재였는데, 그는 황급히 책을 펼쳐 면지에 만년필로적힌 이름을 가리키며 "이게 우리 아버지가 쓰던 책이오"라고 말했다. 가격은 4.50파운드였는데 나는 그 손님에게 그냥 가져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 책이 어떻게 서점에 들어오게 됐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손님이 그 책을 발견하고는 너무 기뻐해서 그냥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켄트에서 휴가차 이곳에 왔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캔•터베리 외곽의 한 집에서 대량으로 사들인 책 사이에 들어 있었던 것같다. - P378

책 상자를 살펴보다가 (목사에게서 사온 책이었던 것 같다) 같은 상자에서 나올 법하지 않은 책 두 권을 발견했다. 하나는 ‘나의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만든 올리브나무로 된 성경 책이었다.
『나의 투쟁』이란 책을 만나면 뭔가 도덕적으로 껄끄러운 입장에처하게 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나의 투쟁』은 60파운드 정도의 가치가있고 많은 서적상들은 웬만해선 건드리려고 하지 않지만, 이 책에 대한수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많다고 할 수는 없어도 한 달 내에 팔릴거라는 기대를 할 정도의 수요는 있다. 문제는 과연 이 책이 어떤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인가이다. 극우적 성향을 가진 미친놈일 수도있고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오류를 밝히려는 사학자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내년에 독일에서 저작권이 만료되면 [나의 투쟁』의 판로에 변화가 올 것이다. - P384

디컨 씨가 4시쯤 앨리슨 위어의 「탑에 갇힌 왕자들』을 주문하러왔다. 팔에 깁스는 이미 푼 상태였다.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간단하고 필요한 말만 주고받았다. 적어도 디컨 씨가 나가려는 순간 내가 아주 발작적인 기침을 할 때까지는, 내가 기침하는 걸 지켜보던 디컨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런, 같은 처지라 마음이 쓰이네요. 나도 많이 아프거든요." 나는 갑자기 그가 어디가 아픈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에게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개인적인 질문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던 나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알츠하이머예요. 요즘 단어들이 생각이 잘 안나요." 그의 이런 안타까운 고백에 뒤이어, 우리는 지난번에 그가 딸들과 함께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나눈 적이 없는 그의 삶에 대한대화를 처음으로 나누게 되었다. 그는 법정 변호사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적절한 단어를 생각해 내지 못하는 무능함을 더욱 좌절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4시 30분에 에든버러로 가기 위해 서점을 나섰다. 서점 문이 내 뒤에서 닫히는 순간 뒤를 돌아보자 니키가 집에서 만들어 온 이름표를 또 책장 한 귀퉁이에 테이프로 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못마땅한 ‘전시후방 소설‘이라는 이름표가 귀환한 것 같다.

매출 18.50파운드
손님 4명 -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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