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른험 침팬지들의 이름은 이곳 사육장에서 태어난 놈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서로 다른 머리글자로 시작된다. 각각의 머리글자는 관찰 중에 약칭으로 사용되는데, 이렇게 하면 집단의 구성원을 쉽게 요약할 수 있다. 장성한 세 수놈(Y, L, N), 어린 수놈 한 놈(D), 장성한 암놈 여덟M, G, F, J. K, S, T. P), 어린 암놈 넷 가운데 한 놈은 거의 어른(A), 아직 어린 나머지 셋(O.Z.H).
두 마리의 양자를 제외하고 사육장에서 태어난 새끼들은 모두 어미의 이름과 똑같은 머리글자로 불린다. 어떤 암놈의 첫 자식에게는 이름의 두 번째 문자에 ‘ㅇ‘를 넣고, 두 번째 자식에게는 ‘a‘를 붙인다. 이미(Jimmie)의 두 자식이 요나스(Jonas)와 야키(Jakie)가 되듯이 말이다.
사육장에는 모두 일곱 마리의 새끼가 있는데 그중 가장 어린 두 놈만이 암놈이다. - P121

몸집의 크기와 사회적 서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사회적 서열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지표로 나타나는 특정한 행동 형태에 의해 더욱 확고해진다. 바로 ‘복종적인 인사(submissive greeting)‘라는 행동인데 야생에서뿐만 아니라 아른험에서도 동일하게나타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인사‘란 헐떡이는 것처럼 짧고 빠르게 ‘아하아하‘ 하는 소리를 계속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위가 낮은 놈은 이런 소리를 내면서 ‘인사‘받는 상대를 우러러 보는 포즈를 취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상대방에게 연신 절을 해대는데 이 동작은 ‘굽신거리기‘라고 불린다. 때로는 ‘인사‘하는 녀석이 나뭇잎이나 나무 막대기같은 것을 가져와서 지위가 높은 놈에게 건네기도 하고, 혹은 발이나 목, 가슴 등에 키스를 하기도 한다. 지위가 높은 침팬지는 이런 ‘인사‘를받으면 몸을 곧추세워 키가 커 보이게 하거나 털을 곤두세운다. 이로인해 실제 체구가 같은 놈들끼리도 외양이 명확한 대조를 보인다. 한쪽은 굴욕적으로 굽실거리고, 다른 한쪽은 왕처럼 ‘인사‘를 받는다. 또한어른 수놈들 사이에서 보이는 우열관계는 지위가 높은 놈이 ‘인사하는 놈을 밟거나 그 위를 넘어 다니는 연극적인 동작을 통해서 더욱 강조된다(소위 말하는 으름장이나 허세 부리기). 이때 지위가 낮은 놈은 몸을 웅크리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이같은 곡예 짓은 암놈이 ‘인사‘할 때는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암놈은 대개 수놈 우위자가 자신의 성기를 검사하고 냄새를 맡을 수 있게 엉덩이를 내민다.
암놈이 엉덩이를 들어 수놈에게 성기를 보여주는 이 행동이 자세를 ‘프레젠팅(presenting)‘이라 한다. - P129

이렇듯 우열관계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표출된다. 먼저 사회적 영향력, 즉 ‘권력‘이다. 이는 누가 누구를 이기고 누가 집단적인 갈등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지를 반영한다. 특히 침팬지들의 경우 이합집산에 능하기 때문에 이런 대결의 결과가 어떨지는 100퍼센트 예측할 수 없다. 다른 동물에 비해 침팬지들 사이에서는 사회적 서열이 일시적으로 역전되는 사태가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래서 그들의 서열 조작은 종종 ‘유동적이다‘라든지 ‘유연하다‘고 표현된다. 때에 따라서는두세 살쯤 된 어린 침팬지가 어른 암놈이나 수놈을 쫓아버리기도 하고강제로 무언가를 시키는 경우마저 있다. 그것은 단순히 놀이에 그치지않고 심각한 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어린 요나스가 어미의 후광을 업고 프란예의 젖을 뺏어먹은 경우처럼 말이다.
새끼들이 어른에게 ‘인사‘를 받는 경우는 없다. 새끼들은 실제적인 권력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형식적인 우위‘는 갖지 못한다. 다툼의 결과는 때때로 지도자마저 나무 위로 쫓겨갈 정도로 다양하지만 ‘인사‘ 의식은 완전히 예측 가능하다. ‘인사‘는 ‘고정된‘ 우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침팬지 사회에서 유일하게 관찰할 수 있는 비상호적인 사회적 행동 양식이다. 간단히 말해, 일정 기간 A가 B에게 ‘인사‘를 하는 경우, 그 기간에는 반대의 상황, 즉 B가 A에게 ‘인사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두드러진 경직성은 일련의 낮은 신음소리를 동반하는 복종적인 인사에서만 나타난다. 침팬지들은 여러 가지방법으로 인사를 한다. 그러나 내가 인용 부호를 붙여 ‘인사‘라고 하는경우는 낮은 신음소리를 동반하는 복종적인 것을 지칭한다. 이에룬은 자신이 1인자였을 때 절대 이같은 낮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고, 대신 집단 내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자주 그 ‘인사‘를 받았다. - P132

이 집단에 있는 아홉 마리의 어른 암놈들이 마치 일치 단결한 것처럼 보인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들이 실제로도 만장일치였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이에룬과 라윗 사이의 우위 경쟁은 가끔 암놈들 사이에도 긴장관계를 조성했다. 그럴 때면 마마와 호릴라 같은 서열높은 암놈들이 분명하게 이에룬을 적극 지지했지만 파위스트나 이미같은 다른 암놈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파위스트는 이에룬 편이 되어 라윗에 대항하려던 마마를 공격한 적도 있다. 이후 암놈들의 공동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을 때에는 반대의 경우도 나타났다. 결국 라윗이 최강자로 등극하자 가장 먼저 이에룬을 버리고 새로운 권력자 진영에 합류한 것은 파워스트였다. 초기에 마마는 파위스트의 탈당에 분노해서 파위스트가 공공연하게 라윗의 편을 들 때마다 그녀를 공격했다. 만일 마마가 없었다면 파워스트나 이미 같은 암놈들이 더 빨리 라윗 편에 달라붙었으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암놈들이 몇 달에걸쳐서 이에룬을 공동으로 지지한 데에는 자발적인 만장일치보다는 마마의 압도적인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배후에 이런 강력한 지지 집단이 있는 이상, 이에룬은 무서울 것이 전혀 없지 않겠냐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첫날부터 그가 집단적인 지원을 상실할 위험성을 갖고 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마마는 그가 따라오는 것을 몇 차례 거부했고 이것은 이에룬의 권력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라윗의 전술에 의한 것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P143

나는 이에룬이 암놈 집단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떼어놓는 라윗의행위를 ‘떼어놓기 간섭(separating interventions)‘이라고 부른다. 그것의단기적인 효과는 명백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장기적으로 가져올 효과를 알아보려고 그해 말에 통계를 분석해보았다. 특히 과정 자체가 느리게 진행될 때 주관적인 인상은 확실히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런 방법이 반드시 필요했다. 우리는 매 5분마다 어느 놈들이 서로 어울려 소집단을 형성하는가, 즉 누가 2미터 이내에 앉아 있는지를 휴대용 테이프에 녹음해왔다. 1976년 여름에 행한 연구에서 우리는 몇백 개의 기록자료를 분석해서 이에룬이 그밖의 침팬지들과 어떤 친소관계에 있었는지를 그려냈다.
라윗이 아직 이에룬에게 주기적으로 ‘인사‘를 하던 1976년 봄, 이에룬은 자기 시간의 30퍼센트 가량을 어른 암놈들의 집단과 무리를 지어 보냈다. 그러나 처음으로 라윗에게 노골적인 도전을 받은 뒤 몇 주동안에는 그 시간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당시 이에룬이암놈들과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있으려고 했다는 것을 뜻한다. 라윗의태도가 변하기 시작한 사실을 간파한 이에룬은 아마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음을 느꼈는지 자주 암놈들에게로 물러나 있었다. 당시 라윗은 이에룬에게 거의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이에룬이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시기에 암놈 무리라는 안전한 피난처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기록 자료의 분석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우리는 곤란한 사태가 진전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새로운 권력투쟁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의 데이터는 매우 현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라윗이 이에룬의 리더십에 좀더 적극적으로 도전해서 수없이 ‘떼어놓기 간섭‘을 자행하고 있던 몇 주 동안, 이에룬이 암놈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차츰 줄어들었다. 급기야 가을이 오자 암놈들과의 접촉 횟수가 뚝 떨어졌고, 암놈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봄철보다 더욱더 줄어들었다. 우리가 조사한 데이터를 통해서 이에룬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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