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주년 기념 서문

침팬지에게 보이는 정치적 속성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주제를 다루는 책만이25년 동안 절판되지 않고 출간될 수 있다. 이런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정치다. 우리는 정치에 깊이 물든 존재로 정치적 권모술수를 즉각 알아차린다. 심지어 인간의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그렇다. 유명한 정치학자 해럴드 래스웰(Harold Laswell)의 말처럼 정치를 "누가, 언제, 어떻게, 무엇을 획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과정으로 정의한다면, 침팬지에게 정치적 속성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과가장 가까운 사촌인 침팬지 또한 사회적 과정에서 허세, 연합, 고립 전략들을 구사한다는 점을 볼 때 이들도 정치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13

이러한 현장 연구들은 평화로운 채식주의자로 그려졌던 침팬지의 이미지를 산산조각냈고, 그들의 놀라운 사회적 복잡성을 밝혀내기시작했다. 그동안은 영장류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육식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침팬지가 원숭이들을 잡아서 쥐어뜯고 산채로 잡아먹는 것이 관찰되었다. 또 초기에 침팬지는 어미와 자립하지 못한 새끼사이의 강한 유대를 제외하고는 사회적 유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여겨졌지만, 현장 연구자들은 숲의 특정 범위에 거주하는 모든 개체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뤄 정기적으로 교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침팬지들은 이웃 영역에 거주하는 개체들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경향을 보였다. 과학자들은 ‘집단(group)‘이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공동체(communities)‘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침팬지는 좀처럼 거대한 집합체를 형성하지 않고, 숲속을 여행하며 항상 변화하는 작은 ‘단체(parties)‘로 나뉘기 때문이다. 이는 합종연횡 (fission-fusion)으로알려진 행동의 일종이다.
인간의 독특성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은 우리가 같은 종을 살해하는유일한 영장류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거부되었다. 침팬지 공동체들 사이에서 일어난 치명적인 영토 분쟁의 보고들은 전쟁 이후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논쟁에 심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16 - P16

1
동물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팬지를 보고 즐거워한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이토록 웃음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왜 그런 것일까? 그들이 곡예를 잘하거나 아니면 이상하게 생긴 외모 탓일까? 물론 우리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것은 그들의 표정과 태도임은 분명하다.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모습이나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만 봐도 웃음을 참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들이 침팬지를 보고 재미있어 하는 것은 아마도 그와는정반대의 감정을 감추기 위함일 것이다. 즉, 인간과 침팬지가 매우 닮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포장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유인원이 우리 인간에게 ‘거울‘을 쥐어 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들의 복제품과도 같은 유인원 앞에서 진지한 표정을 짓기는 아마도 어려울 듯하다. - P27

침팬지처럼 머리 좋은 동물을 상대로 탈출 기회를 완전히 차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들은 열쇠 사용법도 알고 있어 가끔사육사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기도 한다. 탈주 사건이 흥미로울 때는시간이 지나서 그 일을 회상할 때뿐이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옷을 여유조차 없이 모두 그 사건이 가져올 위험만을 먼저 떠올린다.
우리들 중에서 누구도 감히 침팬지들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사육사와 내가 무리 가운데 몇 마리와 제법 친숙해지는 순간도 그들이 잠자리에 들어갔을 때뿐이다. 동물원에서는 어른 침팬지의 경우결코 마음을 놓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사람들보다 체중은 덜 나가지만 힘은 훨씬 세다. 동물원에서 벌어지는 침팬지와 관련된 문제는 모두그들의 강한 팔 힘 때문에 일어난다. 팔 힘뿐만 아니라 불 같은 성미도침팬지를 위험한 동물로 간주하는 데 한몫 한다.
야생 침팬지의 경우는 자신들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못하며, 도리어 사람과 사람이 지닌 무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야생 침팬지는 일단 사람과 친숙해지면 아른험 집단의 침팬지보다 훨씬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다. 반면, 이곳아른험에서는 도랑 너머 6~60 미터 거리를 벗어나야만 그들을 관찰할 수 있다(관찰대에서 보는 경우를 제외하고 동물원 관람객과의 거리는 더 멀다). 탄자니아 곰비의 경우, 야외 연구자는 더 가까이 다가가 침팬지 곁에 앉아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침팬지들은 자신들이 인간보다 어느 정도 힘이 센 사실을 알아챈 듯하다. 가장 악명 높은 성격의 소유자인 근육질 침팬지 프로도(Frodo)는 캠프 근처의 방문객들을 손바닥으로 맘껏 때리고, 때로는 질질 끌고 다니기도 했다. 한번은 프로도가제인 구달의 머리 위에 올라가 힘껏 짓누르는 바람에 그녀의 목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겁주거나 지배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굳은 신뢰감을 손상시키지 않고 침팬지의 그런 행동을 중단시킬 수 있는 연구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 P43

동물행동학(ethology)이란 동물의 행동을 생물학적으로 연구하는것을 가리킨다. 1930년대 콘라드 로렌츠(Konrad Lorenz)와 니코 틴버겐(Niko Tinbergen)의 영향으로 생겨난 이 학문은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했다. 동물행동학과 동물심리학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동물행동학이 어디까지나 ‘자연환경‘에서 또는 적어도 가능한 한 자연적인 조건에서의 ‘자발적인 행동‘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동물행동학자들은 물론 실험도 하지만 야외조사를 절대 빼놓을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인내심이 강한 관찰자라야 한다. 어떤 실험 목적을 위해 특정 행동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관찰하기 위해 한없이 기다리는 태도를 지녀야하는 것이다. 이는 아른험에서 이뤄진 우리 연구의 특징이기도 하다. - P47

이것이 이른바 게슈탈트 지각(Gestalt perception)의 종합 원리이다. 즉, 게슈탈트(전체)란 단순한 부분들의 합 이상이며 지각을 학습한다는것은 구성 부분들이 규칙적으로 전개되는 여러 가지 패턴을 인식할 수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침팬지들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의여러 패턴에 익숙해지면 그것들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명확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지엽적인 문제에 구애받거나 상황의 기본적인 논리를 놓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게 된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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