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나는 과연 서점 주인을 ‘업‘으로 삼고 싶은가? 내가 일했던 서점의 주인은 내게 친절히 대해 주었고 서점에서 행복했던 날도 있었지만, 대체로 아니올시다.
-조지 오웰, 「서점의 추억들」, 런던, 1936년 11월

서점 주인이 되기를 주저하는 오웰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서점 주인은 성마르고 편협하고 비사교적이란 고정관념이있는데(<블랙 북스>란 코미디에서 딜런 모런은 이런 서점 주인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그건 ‘대체로 사실인 듯하다. 물론 예외는 있고 그런 유형에 속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유형에 속한다. 하지만 나도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서점을 인수하기 전까지만해도 나는 유순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고객들이 속사포같이 쏟아내는 의미 없는 질문, 서점의 위태로운 경제 사정, 점원들과 끝도 없이 벌이는 사소한 언쟁, 진이 빠질 만큼 집요하게 책값을 깎으려 드는 손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럼 이런 일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으냐고? 아니올시다. - P7

대부분의 책 거래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전화를 해서 최근에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 고인의 책을 처리하는 일을 맡게 됐다는 얘기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연히 그 사람들은 아직 고인을 애도 중인 경우가 많아서 얘기를 듣다 보면 아주 약간이라도 그 슬픈 감정에 동요되지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고인이 남긴 책들을 훑어보다 보면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관심거리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성격까지도 어느정도는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런 일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는 친구네집에 가서도 책장부터 관심이 가고, 특히 친구에 대해 내가 전혀 몰랐던 점을 드러내거나 뭔가 친구와 어울리지 않는 책에 시선이 간다. 내 책장도 이런 점에서 떳떳하지 않다. 내 책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대소설과 스코틀랜드 예술과 역사에 관한 책들 사이에는 「야한 이디시어 회화』와 『수집할 만한 제3제국 시대의 숟가락』이 꽂혀 있다. 첫 번째는 애나가 준 선물이고, 두 번째는 친구 마이크가 준 것이다. - P21

1899년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의 출판사들은 책은 반드시할인가가 아닌 정가로만 판매한다는 조건으로 서점에 책을 공급하기로 동의했다. 이 계약을 위반한 서점에게는 어떤 종류의 책이든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조항에도 동의했다. 이것이 바로 ‘도서정가제Net Book Agreement(NBA)‘이다. 이 제도는 1991년 딜런스와 워터스톤스 같은 대형체인 서점이 소규모 독립 책방들을 위축시키며 부상하기 전까지는 모두에게 이롭게 잘 적용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금세 하자 있는 도서에대한 면제 조항을 악용해서 도서정가제를 회피할 구실을 찾아냈고, 할인하고자 하는 책의 모서리에 사인펜으로 십자 모양 자국을 냈다. 아직까지도 책을 살 때 이 표시를 종종 발견한다. 이로 인해 출판사와 대형체인 서점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잇따랐고 결국 1997년 공정거래청에서 ‘도서정가제는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끝이 났다.
도서정가제의 장점 중 하나는 출판업계가 잠시나마 경제적인 안정을 찾고 그 덕분에 출판사에게 시장성보다는 문화적인 가치가 있는책을 출판할 여유를 제공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그런 안전망이 없는요즘에는 출판사들이 시장성 없는 책의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기때문에 매년 영국에서 인쇄되는 책의 양은 증가하고 있지만 책의 종류는 줄어들고 있다. 종수는 적은데 부수만 많이 발행하는 것이다. 이제 출판업계는 출판사가 아니라, 오웰이라면 ‘대형 자본combines‘이라고 불렸을 워터스톤스나 테스코"와 같은 유통업체들이 지배하는 시장이 되였다. - P40

자식이 있는 책 거래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안타까운 감정이 북받쳤다. 이렇게 고인의 장서를 처분하는 일은 어쩌면 그들의 특성을 해체시키는 최후의 작업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그들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증거의 마지막 조각을 없애는 책임을 맡은 느낌이랄까. 고인이 된 부인의 장서는 그 부인의 개성, 말하자면 그녀가 남긴 것 가운데 유전 형질에 가장 가까운 취향의 기록이다. 어쩌면 이것이 고인의 조카가 내게 책을 봐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 이유일지도 모른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오랫동안 그 아이의 방에 있는 물건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 P48

점심때쯤 온 손님이 내게 책을 도둑맞은 적이 있는지 물었다. 우리서점은 미로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 훔치려고 한다면 책 도둑 입장에서는 꽤 유리한 여건이긴 하지만, 이제까지 이 문제를 한 번도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예전에 종종 원하는 책을 못 찾으면 아마 도둑맞았나 보다고 추측을 하기도 했는데 결국 대부분은 생각지 못한곳에서 튀어나오곤 했다. 그러고 보면 책을 훔치는 일은, (예를 들어) 시계를 훔치는 일보다는 왠지 도덕적으로 비난을 덜 받아도 될 만한 일처럼 느껴진다. 아마 일반적으로 책은 그 자체가 교화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가 범죄로 인해 받는영향보다 더 큰 사회적 개인적 가치를 지닌다고 간주되는 때문인지도모르겠다. 혹은 책이 범죄를 막지는 못해도 분명 완화하기는 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 P56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책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수도 있다. 책에 대한 견해는 전적으로 주관적이니까 말이다. 내 친구중 하나는 런던에서 고급 보석상을 한다. 그 친구에게 경매장에 가서물건을 고르는 판단 기준을 물어본 적이 있다. 친구는 처음 보석 관련일을 시작했을 때는 보기에 너무 거슬리지 않고(물론 그 친구의 눈에 보편적인 매력을 가진 물건을 샀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보석은 잘 팔리지도 않을뿐더러 가치도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곧 알게 되고서 전략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제는 뭔가 아주 강렬한 반응이 오는 물건이면 무조건 사. 너무 마음에 들거나 너무 보기 싫거나. 그런 물건은 나중에 확실히 큰돈이 되거든."
상당수의 책방은 특정 분야의 도서를 전문으로 취급한다. 난 아니다. 우리 서점은 쟁여 넣을 수 있는 한 광범위한 주제와 다양한 종류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우리 서점에서 모든 사람이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10만 권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빈손으로 서점을 나간다. 누가 스피노자의 다 낡은 『윤리학』 페이퍼백을 2.5파운드에 사든, 밀스&분의 책을 2.5파운드에 사든 상관없다. 난 그저 손님 한 명 한 명이 모두 독서 경험을 통해 동등한 기쁨을 얻어 내기를 바랄 뿐이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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