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아가 라오스에서 하던 ‘쉬운‘ 일 수십 가지를 얘기해주는 동안 나는그녀가 자신을 바보라고 했을 때 진짜 전하고 싶었던 바는 전에 할 줄 알던것들이 미국에서는 전혀 써먹을 수 없다는 사실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남은 아이 아홉에게 너무나 훌륭한 엄마가 되어주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마지막 남은 그 능력마저 미국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부정당했다. 그녀는 법적 선고를 받은 아동 학대자였다.
나는 푸아에게 라오스가 그립냐고 물어보았다. 대나무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는 잠시 말없이 몸을 앞뒤로 흔들흔들했다. 딸은 대답이 궁금한지 엄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푸아는 입을 열었다.
"모자란 음식, 지저분하고 다 떨어진 옷을 떠올리면 생각하고 싶지도않지요. 여긴 대단한 나라예요. 살기 편하고 먹을 것도 많지요. 하지만 말을 못하잖아요. 남한테 기대서 살아야 하고, 복지 수당을 안 주면 굶어 죽어야 할 거고요. 라오스가 그리운 건 마음 편하고 자유로운 거지요. 원하는대로 할 수 있고. 자기 땅 있겠다. 자기 쌀 있겠다. 자기 채소 있겠다. 자기 과일나무 있겠다. 그런 자유가 그립지요. 정말 내 것이 있던 게 그립지요." - P179

미국에선 이 라오스 내전을 "조용한 전쟁"이라 불렀다. 라오스 내전이 난투극(미국이 계속해서 왕국군을 지원하는 사이 소련과 중국은 배후에서 인민군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이 되어버릴 만큼 베트남전쟁이 점점 요란해졌던것이다. 그러나 몽족에겐 결코 조용한 전쟁이 아니었다. 라오스에 투하된 폭탄은 200만 톤이 넘었는데 대부분 미국 비행기가 몽족 거주지에 있는 인민군 부대를 공격하면서 퍼부은 것이었다. 9년 동안 8분에 한 번꼴로 폭격을 위한 출격이 있었을 정도다.
1968년부터 1972년 사이 단지평원 한 곳에 투하된 폭탄의 톤수가 제2차세계대전 동안 미군이 유럽과 태평양에 퍼부은 양보다 많았다. 1971년 단지평원 상공을 비행한 T. D. 올먼 기자는 야트막한 언덕 한 곳에도 폭탄구멍이 수백 개가 넘고 평원의 식물이 고엽제 때문에 대부분 고사 상태이며 밤낮으로 소이탄이 터지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단지평원은 지금도 폭탄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터지지 않은 집속탄이 흩어져 있어 농민이 괭이질을 하거나 아이들이 호기심에 건드렸을 때 폭발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몽족 사상자 수가 자꾸 늘어나자 어린 병사들을 징집하게 되었다. 그러지 않고선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잘 훈련된 (그리고 매년 교대를 하는) 북베트남 군인들을 대적할 수 없었다.  - P221

전쟁이 일으킨 가장 극심한 변화는 몽족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자산, 즉 자급자족의 능력을 잃게 만든 것이었다. 밭은 방치되고 가축은 버려졌고산에 사냥감이 사라져버리자 1만 명이 넘는 몽족은 미국이 후원하는 식량투하로 연명해야 했다. 날씨가 좋고 적의 공격이 그리 심하지 않으면 에어 아메리카의 화물기가 낙하산으로 떨어뜨리고 가는 쌀이 하루 50톤이었다. 한 조종사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메오족 한 세대는 누가 쌀이 하늘에서 나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면 깜짝 놀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양식이 해결되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에 살던 사람들은 양귀비 재배에 더 공을 들이게 되었고 그만큼 아편 거래가 활발해졌다. 몽족의 마을과 임시 거주지 모두 쌀을 공급받은 건 아니었고, 공급받는다해도 일인당 배급량이 하루 500그램 정도였기 때문에 전에 먹는 양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쌀을 받아먹던 일은 지금도 몽족에게 가슴 사무치는 기억이다. 조나스 방아이에게 물어봤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당시의 몽족을 게으르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쌀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몽족은 언제나 자기가 먹을 쌀을 길러왔습니다. 라오스인들은 몽족한테 소금 등의 물자를 주고 쌀을 사 먹곤 했지요. 몽족은 절대 라오스인한테 쌀을 사 먹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시에 평야지대에 내려와 보니 쌀이 충분치 않았어요. (그들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어요.)" - P2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