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가을에 워싱턴은 마녀사냥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사소한 혐의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매카시 상원 의원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1953년11월 24일에 매카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애처로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다음날 잭슨은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에게 자신은 "매카시가대통령에게 전쟁을 선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스턴은 이 말을익명의 백악관 관계자의 이야기라며 자신의 칼럼에 인용했다. 한 아이젠하워 보좌관은 기사를 읽고서 잭슨의 발언은 "매카시와 그의 동지들이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라며 비난했다. 잭슨은 매카시의 공격에 아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지도력의 부재‘에 대해 걱정하던 느낌들이 이번 주에 기어코 현실화되고 말았다. 나는 두렵다."라고 썼다." 그는 대통령 수석 보좌관 셔먼 애덤스(Sherman Adams)에게 자신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최소한 매카시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 보좌관들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란다."라고말했다. - P721

그러나 3월 말이 되자 개리슨은 청문회 위원들이 1주일 동안 오펜하이머에 대한 FBI 조사 파일을 검토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FBI 파일에 포함된 오펜하이머 관련 내용을 파악하는 데도움을 주기 위해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검사측" 변호사가 여기에 참가할 것이었다. 위원들이 1주일 동안이나 파일들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의뢰인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개리슨은 "땅이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그 브리핑에 참가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동시에 개리슨은 자신이 최소한 같은 정보를 읽어 볼 수는 있도록 긴급 비상 비밀 취급 인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스트라우스는 법무부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비상 인가를 내주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스트라우스의 관점에 따르면 오펜하이머와 그의 변호사에게는 피고인에게 주어지는 그 어떤 "권리도 없었다. 이것은 민간 재판이 아니라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인사 보안 위원회 청문회였다. 스트라우스가 모든 규칙을 결정할 것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의 변호를 방해하기 위해 자신이 하고 있는일들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FBI의 도청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어느 요원에게 "FBI가 프린스턴에서 녹취한 오펜하이머에 대한 도청내용은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대응책을 미리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에게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런 책략들은 해럴드 그린의 비위를 건드렸고, 그린은 마침내 스트라우스에게 "이 사건은 조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고발에 가까우며, 나는 이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건에서 빠질 수 있도록 요청했다. - P738

갑자기 아인슈타인이 나타났고 오펜하이머는 잠시 멈춰 서서 그와 대화를 나눴다.
홉슨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차에 앉아서 기다렸다. 잠시 후오펜하이머는 차로 돌아와 그녀에게 "아인슈타인은 나에 대한 공격이너무 터무니없어서 그냥 사직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나치스 치하 독일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기억하는 듯했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어야 할 책임은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국에 충실했고, 그 대가가 이것이라면 그역시 조국에 등을 돌려야 할 것이다." 홉슨은 오펜하이머의 반응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인슈타인은 이해하지 못해."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나치스에 감염되려 할 때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미국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없었다. 흡슨은 나중에 "그는 미국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과학에 대한 것만큼이나 깊은 것이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풀드 홀 사무실로 걸어가면서 오펜하이머가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조교에게 "저기 나르(narr, 바보)가 간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물론 미국이 나치스 독일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펜하이머가 도망쳐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매카시즘에 크게 놀랐다. 1951년 초에 그는 자신의 친구인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곳 미국에서 "수년전 독일에서의 재앙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의 세력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묵종하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정부의 보안 위원회에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굴욕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유해한 과정 자체에 정당성을부여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 P746

키티와 결혼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진 태트록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증언을 하는 모욕을 주고 나서, 롭은 오펜하이머에게 그녀의 친구들의 이름을 묻고 그들 중 누가 공산주의자였고 누가 단순 동조자였는지를 질문했다. 그것은 청문회의 목적상 의미 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렇다고전혀 무의미하지도 않았다. 당시는 매카시 광풍이 극에 달했던 1954년이었고, 이전에 공산주의자, 동조자, 좌익 활동가였던 사람들을 의회 청문회 자리에 불러내 이름을 대라고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매카시식 정치게임이었던 것이다. ‘밀고자‘ 또는 가롯 유다를 혐오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그것은 치욕적인 경험이었다. 그들의 노림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인격 자체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오펜하이머는 롭에게 이름을 댔다. 그는 토머스 애디스 박사가 공산당과 가까웠다고 생각했지만 당원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슈발리에는동조자였다. 케네스 메이, 존 피트먼, 오브리 그로스만, 그리고 이디스안스타인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얼마나 굴욕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고 있었고, 롭에게 빈정대듯이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라고 물었다. 흔히 그렇듯이 그들은 대개 알려진 인물들이었다. 톱의 가차 없는 심문에 오펜하이머는 마침내 큰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그는 생각하지 않고 반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나중에 한 기자에게 "군인이 전투 중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회고했다. "너무도 많은 일이 벌어지거나 곧 벌어질 것이어서 다음 행동밖에는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싸움할 때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싸움이었어요. 나는 내 자신을 느낄 틈조차 없었습니다."
수년 후, 개리슨은 이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오펜하이머의 심리 상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에게는 뭔가 쫓기는듯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당시의 분위기에 압도되긴했지만 오펜하이머는 특히나 그랬습니다." - P774

 그가 묻고 싶었던것은, 당신 남편이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정리한 것은 언제였는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모릅니다, 그레이 씨. 다만 우리는 아직도 공산주의자라고 알려진 사람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이것은 물론 슈발리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하는 것에 놀란 롭은 "뭐라구요?"라고 되묻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계속해서 공산당과 "확실히 관계를 끊게된 과정"에 대해 다시 한번 물었다. 키티는 현명하게 대답했다. "사람에따라 다르겠지요, 그레이 씨. 어떤 사람들은 급작스럽게 관계를 끊고, 그에 대한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천천히 단계적으로 멀어집니다. 나는 공산당을 떠난 것이지, 나의 과거나 친구들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공산당을 떠난 후에도 공산주의자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 P809

그는 그레이 위원회에게 "시간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낳을 수 있는 커다란 오해"를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43년 슈발리에 사건은 당시의 상황에서 판단해야만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이른바 우리의 용감한 연합국이었습니다.
러시아인과 러시아에 우호적인 인물들에 대한 태도는 현재와는 매우다른 것이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성품과 충성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개리슨은 위원들에게 "당신들은 이 사람과 이제 단 3주를 함께 보냈을 따름입니다. 당신들은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그와 같이 생활해 보지 않았습니다."
개리슨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본 청문회에서는 오펜하이머 박사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합중국 정부 역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개리슨은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걱정"에대해 말하며 은근히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에 창궐했던 반공 히스테리로 인해 미국의 국가 안보 기구들은 이제 "공산주의라는 단일한 세력이 훌륭한 재능을가진 사람들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민들을 먹어 치워서는 안 됩니다." 개리슨은 그레이 위원회가 "사람 전체를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최종 변론을 마쳤다. - P811

결국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는 만료되기 하루 전에 취소되었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들의 평결을 읽고 나서 릴리엔털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 그들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로버트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그들은 현명한 공직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넌더리가 난 나머지 앞으로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를 "원자력박멸 음모(Atomic Extermination Conspiracy)"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빈정거렸다.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가 취소되기 전인 6월, 스트라우스는 청문회 녹취록 사본이 기차에서 도난당했다며 (그것은 곧 뉴욕 펜실베이니아역 분실물 센터에서 발견되었다.) 타자로 친 3,000쪽짜리 녹취록을 정부 인쇄국(Government Printing Office)을 통해 출판해야 한다고 동료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들을 설득했다. 이것은 증인들의 증언을 비밀로 유지하겠다는 그레이 위원회의 약속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트라우스는 자신이 홍보 전쟁에서 밀리고 있다고 판단해 그런 우려 정도는무시해 버렸다. - P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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