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에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경험이 있는 오펜하이머는 1953년에 그 실체를 직시할 수 있었다. 프랭크처럼 그는 당시 미국 공산당이추구하는 사회 정의를 향한 비전에 끌렸다. 패서디나의 공공 수영장에서 인종 차별을 철폐한다든지, 농장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라고 요구한다든지, 교원 노조를 조직하는 것들은 모두 해방감을 맛보게해 주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 그는 또 다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호소하면서 자신이 젊은 시절 꿈꾸었던 가장 숭고한 이상을 지적인 차원에서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열린 사회를 향한 그의 요구는 비밀주의가 미국 사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그의 우려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넓게 보면 그것은 미국의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히로시마 이전부터, 로스앨러모스 이전부터, 그리고 진주만 사건 이전부터 사회 정의라는 목표를 향해 노력했다. 미국에서 공산주의의 역할은 바뀌었다. 책임 있는 미국 시민으로서 오펜하이머의 역할도 바뀌었다. 하지만 그가 깊숙이 간직했던 가치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리스 강연에서 "열린 사회, 지식에 대한 무제한적 접근, 자기 계발을 위한 인간의 제한없는 연대. 이러한 가치들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지고, 급변하고, 전문화하는 기술 사회 속에서 인류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P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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