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사실, 또는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에 대한 미신이 있다. 어떤 작가가 쓴 소설이 사실이라고 하면 구미가 당긴다. 심지어는 소설가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사실을 썼다고 믿고싶어하거나 사실을 썼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한다. 우리는 그다지 치밀하지 않고 현명하지도 않다. 사실을 썼다고 하더라도 소설가가 쓴 것은 결국 소설이다. 백 퍼센트 증류 상태의 사실이란 없다. 더구나 소설 속으로 들어오면 더욱 없다. 그런데도 사실, 또는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우리를 흘린다. 사실에 대한 우리의 신봉은 소설을 작가의 삶과 겹쳐서 읽게 한다. 지금의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나는 박부길의 소설을 박부길의 삶 위에 포개려고 한다. 그가 자신의 삶을 사실 그대로 베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자신의 삶을 가지고 만든 소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선택과 배제를 통해 재구성된 삶이고, 또한 거기에 굴절과 왜곡이 불가피하게 가해졌으리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을 그의 삶 위에 포개려는 시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선택과 배제, 그리고 굴절과 왜곡은 그의 선택과 배제이고 그의 굴절과 왜곡이다. 그가 선택하고 배제한다. 그가 굴절하고 왜곡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사실은 그가 선택하고 배제하고 그가 굴절하고 왜곡한 사실이다.  - P189

 훼손되지 않은 그의 순수한 ‘자실‘을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뜻이 있을까?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와 이유가 있는 사실은 그가 선택하고 배제한, 그가 굴절하고 왜곡한 그의 사실이다. 그 사실만이 의미 있는 사실이다. 사실의 선택과 배제, 그리고 굴절과 왜곡의 과정을 통해 그는 자기의 진정한 의미 있는, 말해질 필요가 있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의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사실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굴절하고 왜곡하는 그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바로 그것을 읽는다.
한 작가의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그 작가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의 의식, 무의식의 다양한 파편들을 선택과 배제, 굴절과 왜곡이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써 소설들을 만든다. 삶의 파편들은 때로 소설의 겉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고, 더 자주는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 있기도 한다. 삶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파편들 속에 감추어둔 작가의 내밀한 음성이지 파편들을 꿰맞춘 사실의 복원이 아니다. 그러나 독자는 책 밖에 있고, 작가가 쓴 글들은 책 속에 갇혀 있다.
독자는 작가를 만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독자는 한 작가가 써놓은 소설들을 읽음으로써, 그 각각의 소설들에 드러나 있거나 감춰져 있는 파편들을 찾아내어 자기의 경험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조합함으로써 나름대로 한 작가를 만든다. 그런 뜻에서 소설이없으면 삶도 없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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