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는 트루먼 행정부의 비밀주의에 대한 강박관념은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이라고 믿었다. 그와 릴리엔털은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이 핵 문제에 더 열린 태도를 갖게 하려고 1년 내내 노력했다. 이제 소련이 폭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과도한 비밀주의 역시오펜하이머는 소련의 성취가 미국이 "보다 합리적인 안보 정책"을 채택필요 없게 된 것이었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자문 위원회 회의에서할 계기를 마련해 주리라는 희망을 드러냈다.
오펜하이머는 강하게 반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의원들은 이미 소련의 성과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며칠 안에 트루먼은 핵무기 생산을 늘리자는 합참의 제안을 승인했다. 미국의 핵무기 보유량은 1948년 6월 당시 50기 정도였으나, 1950년 6월 무렵이면 300기이상으로 급속히 늘어날 것이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원자력 에너지위원회 위원인 스트라우스는 소련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우위가필연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하는 메모를 돌렸다. 그는 물리학 용어를 빌어 미국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기술에서의 "양자 도약(quantum jump)"이 필수적이라고 제안했다. "이 나라는 열핵 폭탄, 즉수소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비상 계획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트루먼은 1949년 10월까지 수소 폭탄의 가능성조차 알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일단 그것에 대해 듣게 되자 대통령은 큰 관심을 보였다. 오펜하이머는 항상 회의적이었다. 그는 코넌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이 빌어먹을 것이 가능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설령 가능하더라도 목표지점까지 그것을 옮길 수 있는 방법은 소달구지뿐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너무 커서 비행기에 실을 수 없으리라는것이었다. 원자 폭탄보다 수천 배 더 파괴적인 무기가 갖는 윤리적 함의에 당황한 그는 수소 폭탄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기를 바랐다. 원자(핵•분열) 폭탄보다 더 끔찍한 수소(핵융합) 폭탄은 핵무기 경쟁을 더욱 가속확할 것이 분명했다. 핵융합의 물리학은 태양 내부의 반응을 본뜬 것이었고, 이는 핵융합 폭발에는 물리적 제한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13 단지 중수소를 더하기만 하면 더욱 큰 폭발을 얻을 수 있었다. 수소 폭탄이 있다면 단 한 대의 비행기가 몇 분 안에 수백만 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어떤 군사 목표물에 사용하기에도 너무나 효과가 컸다. 그것은 무차별한 대량 살상 무기였다. 그와 같은 무기의 가능성은오펜하이머를 소름끼치게 했던 것만큼, 공군 장성들, 그들을 지원하는의원들, 그리고 수소 폭탄을 만들려는 텔러의 야망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의 상상력에 강하게 불을 질렀다. - P633

1945년 9월에 이미 오펜하이머는 콤프턴, 로런스, 페르미와 함께 참여했던 과학 자문 특별 위원단에서 비밀 보고서를 쓴 바 있었다. 보고서에서 그들은 "현재 상황에서 수소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이는 권고일 뿐이었다. 오펜하이머는 공식적으로는 어떤 윤리적 우려도 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콤프턴은 모두를 대표해 헨리 월리스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수소 폭탄을) 개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엄청난 인류의 재앙을 초래하느니 차라리 전쟁에서 패배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후 4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소련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핵무기는 미국이 봉쇄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수단으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무기 보유량은 100기를 넘어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질문은 단 하나였다. 이 새롭고 거대한 무기가 만들어진다면 미국의 국가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 P634

하지만 문제를 기술적 또는 정치적 고려 사항들로 제한하는 것은 책임감 없는 행위이자 직무유기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들은 어찌 되었건 결국 원자 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과학적 지식을 제공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엘리트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은 열렬한 애국심으로 그 과업을 완수했다. 그들은 신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하려 결심한 정부의 결정을 따랐다. 오펜하이머는 폭탄을 일본에 사용하는 것에 레오 질라르드와 로버트 윌슨 같은 과학자들이 제기한 윤리적 이의를 봉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논쟁들은 전면전의 맥락에서, 원자 폭탄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국가 정책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1949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미국은 전쟁 중이 아니었고, 핵무기 개발 경쟁은 소련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새롭고 위험한 국면을 맞이했으며, 자문 위원회의 위원들은 미국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많은 지식과 경륜을 갖춘 핵 과학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몰살시킬 수 있는 무기에 대한 논의에서 군사 정책적 측면만을 고려할 수 없다는 데에 모두 동의했다. 기술적인 평가는 물론이고 윤리적인 문제도 같이 고려해야만 했다.
오펜하이머는 "이 무기의 사용은 수많은 인명의 살상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것은 군사적, 또는 준군사적인 목표물만을 파괴하기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원자 폭탄의 경우보다 훨씬 더 민간인 살상에 관한 정책에 깊은 함의를 갖게 된다." - P639

오펜하이머는 순진하게도 이것으로 슈퍼 폭탄에 대항한 싸움에서승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텔러와 스트라우스를 비롯한 수소 폭탄지지자들이 곧 반격을 가할 것임은 명약관화했다. 맥마혼 상원 의원은 텔러에게 자문 위원회 보고서가 "나를 짜증나게 한다."라고 말했다. 맥마혼은 소련과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그는 릴리엔털에게 자신은 미국이 "그들이 먼저 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들을 지구상에서 싹쓸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드니 소우어스 제독은 "우리가 (수소 폭탄을) 먼저 만들거나 러시아 인들이 경고 없이 미국에 그것을 투하하기를 기다리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경고했다. 워싱턴의 관료들은 이와 유사한 종말론적 반응을 보였다. 슈퍼 폭탄에 대한논쟁은 미국 사회 기저에 깔려 있던 냉전의 집단 광기를 촉발시켰고, 정치인들과 정책 결정자들은 군비 경쟁론과 군비 통제론의 양 진영으로 영구히 나뉘게 되었다. - P642

그날 저녁 트루먼 대통령은 미리 준비된 것이 틀림없는 라디오 연설문을 통해 "열핵 무기의 기술적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동시에 그는 국가 안보 전략의 종합적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 작업은 케넌의 후임으로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을 맡게 된 폴 니츠에게 맡겨졌고, 그는 극비 정책 메모인 NSC-68을 작성했다. 니츠는 대규모의 핵무기 비축을 옹호했으며 소련이 세계 정복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는 "자유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을 증강하기 위해신속하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950년 4월에 회람된 NSC-68은 핵무기 "선제 이용 금지" 정책을 표방한 케넌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와는 반대로 다량으로 비축된 핵무기가 미국 국방 전략의 근간이 될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트루먼은 모든 종류의 핵탄두를 만들기 위한 생산 능력 확대에 필요한 산업 프로그램을 승인했다.
1950년대 말이 되자 미국의 핵무기 보유량은 핵탄두 300기에서 무려 1만 8000기까지 늘게 된다." 이후 50년 동안, 미국은 7만 기 이상의 핵무기를 만들게 되고 핵무기 프로그램에 5.5조 달러라는 엄청난 자금을 쏟아붓게 된다. 돌이켜 보면, 그리고 그 당시에도, 수소 폭탄 개발 결정은 냉전 시기 군비 경쟁의 전환점이었다.  - P649

오펜하이머는 수소 폭탄 결정이 여론을 수렴하지도 않고 공론을 모으지도 않은 채, 그 결과에 대한 솔직한 평가 없이, 비공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비밀주의는 무지한 정책을 낳았고, 그래서 오펜하이머는 비밀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기로 결심했다. 1950년 2월 12일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가 엘레노어 루스벨트의 일요일 오전 토크쇼 첫방송에 출연해 수소 폭탄 결정을 내리게 된 과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보고 화를 냈다. 오펜하이머는 시청자들에게 "이것들은 복잡한 기술적 문제들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윤리성의 바탕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결정들이 비밀로 분류된 정보에 기초해서 내려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스트라우스에게 이런 코멘트들은 공개적으로 대통령에게 반기를 드는 행위였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한 말의 발언을 녹취한 문서를 백악관에 보내기까지 했다. - P651

오펜하이머의 설명에 따르면 전술 핵탄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1946년에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펜하이머도 그와 같은무기의 개발을 비난했다. 하지만 1949년 소련의 원자 폭탄 실험 성공 이후 오펜하이머와 자문 위원회의 동료들은 슈퍼 폭탄의 대안으로 이와같은 ‘전장‘ 핵무기를 더 많이 만들 필요가 있다고 트루먼 행정부에 제안했다. 오펜하이머가 맨스필드에게 말했듯이, 핵무기의 군사적 효용은
"전쟁 계획의 현명함과 원하는 곳을 폭격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는것이지, 폭탄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서 실전을 치르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한국에서의 핵무기 사용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소형 전술 핵무기가 필요하다는것은 명확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951년 2월 <원자 과학자 회보》에 "군사 작전 수행에서 원자 폭탄의 유용함이 필수적인 부분으로 인식되어야만 비로소 그것은 전쟁을 치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썼다.
맨스필드는 보든에게 "나는 오펜하이머가 (소련과의) 전쟁은 있을 수없는 일이며, 값어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스스로 주장하는 자제와 중용의 정책이 미칠 장기적 결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 나는 또한 그가 고집스러운마음으로 보았을 때 전략적 폭격이란 서툴고 굼뜬 것이라고 생각하리라고 믿는다. 그것은 외과용 메스 대신에 큰 망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한 상상력이나 섬세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에 과학자들 사이에서 특히 자주 보이는 윤리적 감성을 합치고, 러시아인들은 독재 정권의 희생자들일 뿐이라는 신념을 더해 보라. 게다가그는 비전투원을 죽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이렇게 보면 그가 왜전술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그토록 강조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한 것이다. - P668

대량 학살 전쟁의 대안으로 전술 핵무기를 선호했던 오펜하이머의 계획에는 예기치 않은 문제점이 숨어 있었다. "전쟁을 전쟁터로 다시 가지고 오게 함으로써 그는 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64 1946년에 그는 핵무기가 "정책의 수단만이 아니라…전면전이라는 개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무기"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하지만 1951년 무렵에 그는 비스타 보고서에 "(전술 핵무기는) 승리가 주요 목적인 전쟁에서 부수적인 용도로 사용될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라고 썼다. "그것은 공포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투 병력들을 지원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오펜하이머는 전술 핵무기의 사용이 훨씬 큰 규모의 핵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무시했던 것이다. 공군이 합리적인 전쟁 전략이라는 이름 아래 아마겟돈을 계획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 P673

것은
"미국 군부 지도자들의 태도"였다. 미국의 고위 장성들은 "전면전이 벌대중의 무지도 문제였지만, 코넌트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던ㄱ어졌을 경우 승리를 가져다줄 희망"을 신무기에 걸고 있었던 것이다. 이나라가 재래식 군사력을 증강시킨다면 "미국은 지금처럼 원자 폭탄에의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코넌트는 이렇게 되려면 장군들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핵무기는 미국에 위험 요소가 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코넌트는 20년 후에 "선제공격 금지"라고 알려지게 될 정책을 제안했다. 그는 미국이 "앞으로의 전쟁에서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을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부시가 제안한 핵폭탄 실험을 암묵적으로 중단하자는제안에도 동의했다. 오펜하이머는 두 가지 아이디어를 모두 지지했다. 실험 중단에 대한 패널의 주장은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들은 애치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열핵 실험이 성공하면 소련 역시 필연적으로 이 분야에 더많은 노력을 쏟아붓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 분야에서 소련은 이미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련이 우리가 핵폭탄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작업이 훨씬 가속화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또한 소련 과학자들은 우리의 실험으로부터 (낙진을 분석함으로써) 폭탄의 치수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 P680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1953년 오펜하이머 패널의 권고를 받아들였다면, 냉전은 한층 덜 군사화된 경로를 밟았을지도 모른다. 번디는 1982년<뉴욕 리뷰 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에 실린 ‘수소 폭탄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다(The Missed Chance to Stop the H-Bomb). 라는에세이에서 이런 추론을 전개했다. 그리고 소련 제국이 몰락한 후에공개된 러시아 문서 기록은 역사학자들이 냉전 초기의 기본 가정들을재고하게 했다. 역사가 멜빈 레플러(Melvin Leffler)가 썼듯이 "적국 문서기록"은 소련이 "동유럽을 공산화하고,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며, 한국에서 전쟁을 벌일 미리 짜여진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스탈린은 독일에 대한 "종합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고, 미국과의군사 갈등을 피하고 싶어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스탈린은 병력을 1945년 5월 1135만 6000명에서 1947년 6월 287만 4000명으로 줄였다. 이는 심지어 스탈린 치하에서도 소련은 침략 전쟁을 벌일 능력도의사도 없었음을 보여 준다. 케넌은 나중에 자신은 "그들(소련)이 서유럽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믿었다고, 또는 그들이소위 핵 억지력이 없었더라도 그 지역을 공격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않았다."라고 썼다. 
스탈린은 잔인한 경찰국가를 통치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소련은 쇠퇴하는 전체주의 국가였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들이었던 게오르기 말렌코프(Georgi Malenkov)와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y)는 탈스탈린화 과정을 시작했다. 말렌코프와 흐루시초프는 핵무기 경쟁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양자 물리학에 관심을 가진 말렌코프는 1954년 전쟁에서 수소 폭탄을 사용하는 것은 "세계 문명의 파멸을 의미할 것"이라는 연설로 공산당 정치국을 발칵 뒤집었다. 변덕스럽고 유별난 지도자인 흐루시초프는 가끔씩 강경한 발언으로 서구인들을 겁먹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데탕트라고 불리게 될 외교 정책을 추구했고, 개방의 첫 여명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1955년 서방 국가들과의 군비통제 회담을 재개했고 1950년대 말 무렵에는 소련 국방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흐루시초프는 1953년9월 핵무기에 대한 첫 보고를 받고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 무기들을 쓸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라고 나중에 회고했다.
흐루시초프에게 오펜하이머 패널이 제안한 것과 같은 급진적 군비통제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을것이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정부는 그 방향으로 가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았다. 주 모스크바 미국 대사로 존경을 받았던 소련학자 찰스 칩‘ 볼렌(Charles ‘Chip‘ Bohlen)조차도 자신의 회고록에 워싱턴이 말렌코프와 핵무기를 비롯한 여러 사안에 대해 의미 있는 협상을 벌이지 못한 것은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나중에 썼다. 1953년 무렵이면 냉전은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선택지를 협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핵의 지니 요정을 호리병 속에 가두려 했던 오펜하이머의 노력은 미국 내부에서의 정치적 기류로 인해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제 공화당 출신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 정치 기류는 오펜하이머를 병에 가둬 바닷속으로 던져 버리려 했다. - P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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