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여러 왕국에서는 수백 년 동안 전통적으로 상업을 제한했다. 경계에 성을 쌓는 것은 그런 교역을 제한하는 방법이었으며, 나라의 부를 그 성벽 안에서 온전하게 지키려는 시도였다. 그런 행정가들이 보기에 교역용 물자를 내놓는다는 것은 이웃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가급적 교역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다.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이제 정부 관리밖에 없었다. 대신 중국 전통사회에서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유교 학자들을 아홉 번째 지위로 낮추었다.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하나 낮은 등급이었다.
칭기스칸 시대 이후 몽골인은 한 곳에서는 흔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물품이 다른 곳에서는 이색적인 것으로 여겨져 잘 팔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3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상인들은 확대되어가는 몽골의교역망 어딘가에서 팔릴 만한 새로운 상품 또는 새로운 방법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오래된 상품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염료나 종이나 약에서부터 피스타치오나 폭죽이나 독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품이 거래될 수 있었다. - P323

 고고학자들은 어떤 장소에 남아 있는 물리적 흔적을 연구하기만독특한 주거단지를 건설했다. 따하면 힌두, 아스텍, 말리, 잉카, 아랍 제국의 성장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인이 아닌 사람들은몽골어를 배우는 것을 금지했다. 몽골은 외래 작물의 경작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몽골은 대규모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전쟁을 목적으로 새로운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몽골 평화 기간에도 똑같은 관행을 유지하여 유목민 사회의 이동 원칙을 생활과 문화가 매우 보수적인 지역에 적용했다. 몽골군은 통역, 서기, 의사, 점성술사, 수학자를 모아들여 악사, 요리사, 금 세공장이, 곡예사, 화가를 분배하듯이 황금가족에게 분배했다. 행정당국은 이 지식 노동자들을 다른 장인이나 동물이나 수송 물자들과 함께 긴 캐러밴용 길이나 바다를 통해 왕실 가족이 지배하는 각 지역으로 보냈다.
전통적인 제국은 한 도시에 부를 축적했다. 모든 길은 수도로 통했고, 늘 가장 좋은 것은 수도에 이르렀다. 한 도시가 제국 전체를 지배하다 보니 로마나 바빌론 같은 이름은 제국 자체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몽골 제국에서는 주요한 도시 하나가 전체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 제국내에서 물자와 사람은 늘 이곳저곳으로 이동했다. - P325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 P333

상당히 그럴듯한, 그러나 확인할 수는 없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병은 중국 남부에서 발생했고 몽골 병사들이 북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병의 세균은 벼룩 속에 살며, 벼룩은 쥐의 몸을 타고 남쪽에서 오는 식량이나 다른 공물과 함께 옮겨다녔다. 벼룩은 보통 사람을 감염시키지않고 말 냄새를 싫어했지만, 곡식 자루나 사람의 옷 같은 주변에서 살다가 사람에게 뛰어들기도 했다. 감염된 벼룩은 고비 사막에 이르자 마못의 굴이나 광범위한 설치류 서식지에서 우호적인 새로운 주거환경을 찾아내 그곳에서 죽 살았다. 이 병은 몽골의 광활한 초원지대에 도사리고있었지만, 인구밀도가 낮았기 때문에 큰 위험은 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이 병으로 매년 여름마다 몇 사람이 죽지만, 소수의 주민이 많은 말과 함께 살아가고 몽골인 거주지에는 벼룩이 없으므로 전염병으로 커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중국의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지역, 그리고 훗날다른 도시의 수많은 쥐는 이 세균에게 완벽한 거주환경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쥐가 오랫동안 인간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아온 동물이라 이병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1331년 연대기 기록자는 허베이성(河北省) 주민의 90퍼센트가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중국은 이 병 때문에 인구가 2분의 1 내지 3분의 1로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13세기 초에 이 나라에는 1억 2300만 명 정도가 살았는데, 14세기 말에는 인구가 650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중국은 몽골 세계체제에서 제조업의 중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국에서 물자가 쏟아져 나가면서 병도 따라갔다. 이런 식으로 페스트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교역기지 근처 무덤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1338년에 페스트는 중국에서 톈산산맥을넘어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호수 근처의 기독교 상인 공동체를 쓸어버렸다. 페스트는 교역으로 옮겨지는 전염병이었다.  - P343

몽골 왕가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자신이 통치하는 주민 내의 특정한 종교분파를 따르게 되자, 왕실 지파들 사이의 불화는 더 심해졌다. 러시아의 킵착 칸국는 무슬림이 되자 이집트와 손을 잡고 아직 이슬람으로개종하지 않았던 몽골의 일 칸국에 대항했다. 일 칸국의 몽골 통치자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그때그때 정치적 판단에 따라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시아파에 가장 헌신한 올제이투의 치세에는 불교도나 유대인 같은 소수파 집단들이 심한 박해를 받았다. 칭기스 칸제국의 보편적 원리는 바람의 재처럼 사라졌다.
무슬림이 된 중동의 몽골인은 쿠빌라이 칸의 예를 따랐다고 볼 수도있다. 쿠빌라이도 중국에서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권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 쿠빌라이 칸의 후계자들은 그의 교활한 천재성을 따르기는커녕 이해하지도 못했다. 몽골 당국은 더 중국화하기는커녕 탄압을 강화하여 고립을 자초했다. 혼돈의 시기에 조정을 구성하던 몽골인 몇 명은 꿈에 칭기스 칸이 나타나 중국인을 더 탄압하기위한 엄중한 새로운 조치들을 여러 가지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조정의 관리들은 중국인에게 자유를 너무 많이 주었고, 몽골인이 지나치게 중국 생활에 동화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중국 문화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대신 자신들의 이질적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중국의 언어, 종교, 문화, 중국인과의 혼인 관계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몽골 당국은 편집증에 사로잡힌 듯 중국인으로부터 모든 무기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철로된 농기구까지 빼앗고, 칼의 사용도 제한했다. 그들은 중국인이 말을 타는 것을 금했고, 비밀 정보가 전달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중국의 잡극이나 전통적인 만담 공연도 금지했고, 더불어 다른 공적, 사적 집회도 금지했다. 이런 식으로 극단적인 탄압을 하자 중국 신민은 불만이 늘었으며, 몽골 통치자들을 더 불신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몽골인이 중국 아이들을 집단 학살했다거나 특별한 성을 가진 중국인을 모두 죽일 계획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몽골인은 가능한 한 중국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한 종교를 공정하게 대접한다는 전통적 정책을 버리고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를 우대하여 특혜를 주었다.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유교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중국인은 몽골 통치자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몽골의 제국 통치를 지원하는 외국인에게 증오심을 분출하곤 했다. 특히 티베트 불교 승려가 증오의 대상이었다.  - P351

몽골의 통치가 끝난 뒤 승리를 거둔 명 왕조의 통치자들은 중국인이 몽골 의복을 입고, 자식들에게 몽골 이름을 지어주는 등 외래의 관습을따르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들은 정부와 사회생활에서중국식 원칙들을 살려낼 목적으로 몽골의 정책과 제도 가운데 많은 부분을 조직적으로 철폐해나갔다. 명의 통치자들은 몽골이 중국에 정착하도록 권유했던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인 상인들을 쫓아냈다. 또 그렇지 않아도 힘을 잃어가던 지폐를 완전히 없애고 금속화폐로 돌아감으로써 몽골이 세워놓았던 상업체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들은 몽골이후원했던 티베트의 라마교 계열의 불교도 배격하여 그 자리에 전통적인도교와 유교의 사상과 전통을 집어넣었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몽골의교역체계를 소생시키려다 실패하자 대양을 다니던 배들을 태우고, 외국인의 중국 여행을 금지하고, 외국인은 못 들어오고 중국인은 못 나가게할 목적으로 국민 총생산의 큰 부분을 투여하여 육중한 새 성벽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여러 항구에 살던 수천 명의 중국인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명은 새로운 몽골 침략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중국식 도시라할 수 있는 남쪽의 난징(南京)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이미 통일중국의통치는 북부의 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주민 다수의 태도와 행동방식도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었다. 명은 결국 옛 몽골의 수도 칸발릭으로 돌아갔다. 대신 명은 몽골의 외양을 제거하여 도시를 다시 만들기로 했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금단의 도시"를 세우려 한것이다. 짧은 기간 예외는 있었지만, 그후 이 수도는 이름만 바뀌었을뿐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베이징은 여전히 중국의 수도 역할을하고 있으며, 현재의 중국은 몽골 치하의 국경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있다. - P353

1964년 4월 소련의 기관지 프라우다(Pravda)는 "피에 굶주린 야만인 칭기스 칸을 역사에서 진보적인 인물로 떠받들려 하는" 시도를 엄중 경고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인이 몽골의 침략 덕분에 "더 높은 문화를 알게 될 기회를 얻었으니 몽골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몽골인은 소련이 그들의 영웅을 공격한 것에 속으로는 불쾌했는지 몰라도, 어쨌든 소련에 끝까지 충성했다.
이후 몽골 박해 과정에서 언어학자, 역사학자. 고고학자를 비롯해칭기스 칸이나 몽골 제국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주제를 전공하는학자들 한 세대가 완전히 사라졌다. 칭기스 칸이 태어나고 나서 800년이 지난 1960년대 무렵 공산주의자들이 보관하던 술데, 즉 영기(靈旗)가 사라졌다. 칭기스 칸이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를 때 들고 다니던 영기였다. 이 숙청의 시대 이후로 칭기스 칸의 술데는 보이지도 않았고 사라진 이유를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학자들 가운데는 당국이 칭기스칸의 영혼을 완전히 파괴하려고 파괴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술데가 어느 지하실이나 폐쇄된 방에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어 있다가, 언젠가 다시 나타나 몽골인을 이끌어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다. - P371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범상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몽골 민족의 어머니가 공격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폭행을 당했다. 그녀를 빼앗기자 어린 테무진은 자신의 젊은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되찾으려 했다. 테무진은 결국 그녀를 구했으며, 이후 평생 동안 자신의 민족을 외침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싸웠다. 이를 위해 쉬지 않고외부인들을 공격하며 돌아다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테무진은 세계를 바꾸었고 민족을 창조했다.
사람들은 냄새나는 말똥더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코를 훌쩍였고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어스름의 침침해지는 황금 빛 속에서 800년의 간격이 녹아 사라졌다. 오래 전 무시무시한 새벽에 그들의 조상이 느끼던 고통이 우리 주위의 연기에 섞여 떠돌고 있었다. 조그만 돌무더기에서 향이 타는 동안 각 사람은 저마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가더니, 모자를벗고 돌 앞에 무릎을 꿇은 다음 언 땅에 이마를 댔다. 이곳이 성스러운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돌무더기를 세 바퀴돌며 공중에 보드카를 뿌렸다.
모두 개인적인 물품을 하나씩 꺼내 돌무더기 위에 남겼다. 각설탕한 조각, 성냥 몇 개, 바스락거리는 종이에 싸인 사탕, 찻잎 한 조각. 마치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납치자들의 손에 이끌려 말에 올라탄 채 미지의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겁먹은 부르테에게 기운을 북돋워주고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작은 선물을 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입을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그들의 어머니에게, 다 괜찮다고, 그녀와 그들, 즉 그녀의 후손은 모든 일을 견디며 800년간 생명을 이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사실 그들은 여전히 ‘황금빛‘의 자식들이며, 이리와 암사슴의 후손이다. 몽골의 ‘영원한 푸른 하늘‘의 성긴 구름 사이로 칭기스칸의 영기는 지금도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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