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은 이전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중국의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민족주의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매혹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초원지대 야만인 출신이라는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그 오랜꿈을 실현하는 데 송나라 통치자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중국 사람들에게 하늘이 오직 쿠빌라이 칸 한 사람에게만 통치를 위임하였으며, 어차피 활력을 잃은 낡은 송 왕조는 시간이 지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계획된 것처럼 보인다.
쿠빌라이 칸은 할아버지가 초원지대 부족들을 최초로 통일할 때 자신과 비슷한 문제들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 공통점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의 응집력 있는 정치적 통일체로 조직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칭기스 칸은 각각 10만 명이 되지 않는 부족들을 놓고 고민했던 반면, 쿠빌라이 칸은 각각 수백만명을 거느린 나라들을 놓고 고민했다는 것이 차이일 뿐이었다. 쿠빌라이 칸은 두 세대 전의 칭기스 칸과 마찬가지로 핵심을 이루는 인종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끈기 있게 국가 건설 사업을 진행했지만, 쿠빌라이에게 그 핵심적인 문화적 정체성은 몽골족이 아니라 중국인에서 나왔다. 그는 중국 백성의 충성스러운 지지를 얻어야 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통일되어 하나의 튼튼한 전체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들을 재건해야 했고, 많은 경우 새로 만들기도 해야 했다. - P286

그러나 쿠빌라이는 결국 대도의 심장부에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은 거의 들어갈 수 없는 몽골인만의 안식처를 만들었다. 몽골의 가족과 고관들은 몽골 전사들이 지켜주는 높은 담 뒤에서 계속 몽골인으로 살았다. 도시 한가운데 짐승을 풀어놓은 넓은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중국문화에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쿠빌라이의 ‘금단의 도시‘는 몽골 수도 한가운데 만들어진 소형 초원지대였다. 몽골 시대에는 내성의 단지전체가 게르로 채워졌으며, 고관들은 자주 이곳에 들어와 살고, 먹고,
잠을 잤다. 칸의 자식을 잉태한 부인들은 반드시 게르에서 몸을 풀었으며,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자라면서 게르에서 교육을 받았다. 쿠빌라이와 그 후계자들은 중국 황제로서 공적인 생활을 했지만, 내성의 높은담 뒤로 들어오면 계속 초원지대의 몽골인으로 살았다. - P290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 수도와 관리들을 정복하면서 자신이 굉장한보석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고 수준에 이른 중국 문명의 대표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오랫동안 쿠빌라이는 그들의 업적을 보존하는 동시에 제국을 개혁하고 확장하려고 노력했다. 일본 학자오카다 히데히로가 썼듯이, "몽골 제국이 중국인들에게 물려준 가장 위대한 유산은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다." 몽골은 다양한 중국어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지역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 티베트, 만주, 위구르 등 인접한 왕국들, 나아가 더 작은 왕국이나 부족국가 수십 개까지덧붙였다. 몽골이 관장하는 새 나라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는 문명의 약 5배 크기였다. 중국의 공식적인 국가 문화는 물론 몽골 문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중국 문화도 아니었다. 쿠빌라이 칸은 잡종을만들어냈다. 쿠빌라이의 노력 덕분에 이 문화는 전 세계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 P303

쿠빌라이는 패배한 송나라 해군을 흡수하면서 자신에게 도전하는섬들을 침공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기술을 얻게 되었다. 그는 송나라 해군을 재건하고 확대했다. 해군을 단순히 해안이나 강 지역의 감시인이 아니라 큰 바다에서 상업과 군사작전 양쪽 일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있는 진정한 대양의 함대로 바꾸어놓으려고 노력했다. 쿠빌라이는 한반도를 거대한 조선소 겸 군사기지로 바꾸어 그곳을 발판으로 일본을 정복하려 했다. 그의 배들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지만, 서둘러 건조하느라 품질은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고학적증거들을 보면 닻을 만들 때도 큰 돌을 두 개 붙여서 만드는 등 손쉬운방법을 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하나를 깎아서 만들었을경우보다 안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은 배에 식량, 갑주, 병기를 실었다. 병기에는 멜론 크기의 도기 수류탄도 있었다.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이 수류탄 안에는 화약과 파편이 가득 들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사절을 몇 번 더 보내 섬나라 일본에게 몽골의 통치에굴복하라고 설득했지만 일본군 지도부는 매번 거부했다. 1274년 쿠빌라이는 약 900척의 함대를 모아 2만 3000명에 이르는 고려와 중국 보병을 태웠다. 몽골 기병의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함대는 11월에 고려와 일본을 가르는 176킬로미터 길이의 방심할 수 없는 바다로 나섰다.몽골군은 해협 중간에 자리잡은 쓰시마 섬, 이어 큐슈 근처의 이카 섬을 쉽게 점령했다. 함대는 하카타 만으로 들어가 군대와 짐승을 상륙시켰다.
사무라이 전사들은 몽골군을 향해 달려나가 일대일 전투를 벌이려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대오를 유지했다. 몽골군은 평소처럼 개인이 아니라 단합된 부대로서 싸웠다. 그들은 앞으로 나서서 결투를 하는 것이아니라 폭탄을 발사하고 화살을 퍼부었다. 몽골군은 유명한 일본 전사들을 도륙했으며, 살아남은 일본 전사들은 해안지대를 떠나 내륙의 요새로 물러났다. 몽골군은 달아나는 일본군을 쫓지 않았다. 그 지역에 대해서 믿을 만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피해는 입었지만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위하며 전장을 떠나 병사와 말과 물자를다시 배에 실었다. 몽골군의 계획은 지금도 수수께끼다. 그들은 다음날 다시 돌아와 일본군을 추격할 생각이었을까?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니 해안을 따라 더 올라가 다른 지점을 공격할 생각이었을까? 이들은 본대가 아니라 일본의 반응과 전술을 시험해보러 나온 부대였을까? 이 전투에서 보기보다 큰 피해를 입어 퇴각을 하려 했던 것일까?
그날 밤 침공군이 모두 배에 타고 있을 때 무시무시한 가을 태풍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일본인이 나중에 가미카제, 즉 신풍(神風)이라고 이름붙인 이 바람은 바다를 휘젓더니 급조한 배 여러 척을 암초와 해안에 내던져 부수어버렸다. 탈출하려고 애를 쓰던 침공군 1만3000명이 죽음을 당했다. 대부분 고려의 안전한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위험한 해변에서 익사했다. 역사상 최대의 함대가 적과 뵨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해전사상 최대의 전사자를 낸 것이다. - P304

그럼에도 일본과 자바에서 패하는 바람에 몽골 제국의 동쪽 한계는일단 물을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았다. 타이완이나 필리핀제도 같은 가까운 섬까지도 뻗어나가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쿠빌라이의통치 초기인 1260년에 이집트의 맘루크 군대에게 패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남서쪽 경계가 확정되고 말았다. 북서쪽 경계는 그로부터 20년 전몽골이 스스로 폴란드와 헝가리를 포기하면서 확정되었다. 따라서 몽골제국은 1242년에서 1293년 사이에 그 최대의 크기에 이르렀으며, 네 번의 전투- 폴란드, 이집트, 자바, 일본이 상대였다가 몽골 세계의 바깥 경계를 확정지었다. 이 네 경계 안의 영역은 파괴적인 원정과 정복에시달리며 그때까지와는 매우 다른 종류의 통치체제에 급하게 적응해야했다. 그러나 그 단계를 지나자 100년간 전례 없는 정치적 안정을 누릴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업, 기술, 지성이 그 전의 역사에서 유례를찾아볼 수 없는 수준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 P309

대칸 자리를 둘러싸고 가족 내의 경쟁하는 지파들 사이에화가 생겼음에도 경제적, 상업적 체제는 쉬지 않고 가동되었다. 간헐적인 싸움 때문에 잠깐 정지되거나 우회하는 일이 생겼을 뿐이다. 때로는전쟁의 와중에도 양편은 싸움을 하면서도 분배 물자의 교환을 허용했다. 우구데이 칸의 손자로서 초원지대 중앙을 통치하던 카이두는 종종사촌 쿠빌라이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카이두 역시 중국 도시 난징주변에 장인과 농부를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아마 그 대가였겠지만, 그는 쿠빌라이가 초원지대 부족들로부터 자기 몫의 말이나 물자를 가져가는 것도 허용했다. 몽골 제국의 행정구역은 중국, 모굴리스탄, 페르시아, 러시아 등 크게 넷으로 나뉘었지만, 다른 지역의 물자에 대한요구는 줄지 않았다. 정치적 분열 때문에 오히려 과거의 분배 제도를 보존할 필요가 강해졌다. 한 칸이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몫을 공급하지 않으면 상대편에서도 자신의 영토에 있는 그 칸의 몫을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서로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정치적 분쟁을 넘어섰던셈이다.
이런 분배 물자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몽골이 전쟁할 때 쓰는 길은 점차 상업적 간선으로 바뀌어갔다. 끊임없이 확장되는 오르토(ortoo)또는 얌(yam)은 몽골에서 베트남까지 또는 고려에서 페르시아까지 소식과 사람, 물자를 말이나 낙타 캐러밴에 실어 보냈다. 물자의 이동이늘어남에 따라 몽골 당국은 이전의 전통적인 길보다 더 빠르고 편한 길을 찾았다. 쿠빌라이 칸은 이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1281년에 황허-몽골인들은 검은 강‘이라고 불렀다의 발원지를 찾아내 지도로 그릴 대규모 원정대를 보냈다. 학자들은 이 정보를 이용해 강의 자세한 지도를 그렸다. 원정대는 중국에서 티베트로 들어가는 길을 뚫었으며, 몽골은 이 길을 이용하여 티베트와 히말라야 지역을 몽골의 역전 제도 안에 포함시켰다. 새로 뚫린 길은 티베트를 중국의 나머지 부분과 상업적, 동교적, 정치적으로 연결시키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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