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코룸의 토론 이후 며칠 뒤 뭉케 칸은 루브룩을 불러 고향으로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자리를 빌려 루브룩에게. 나아가서 그를 통해 유럽의 통치자들에게 자신은 어떤 하나의 종교에 속한 사람이아니라고 설명하면서 몽골인의 관용과 호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몽골인은 하나의 신을 믿소. 우리는 그 신에 의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하오. 우리는 그 신에게 정직하게 다가가요." 뭉게 칸은 또 덧붙였다.
"신이 손에 여러 손가락을 주셨듯이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소. 신은 당신들에게 경전을 주셨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그 경전을따르지 않고 있소." 몽케 칸은 그 증거로 기독교인이 정의보다 돈을 앞세운다는 점을 들었다. 이어 신이 몽골인에게는 경전 대신 거룩한 사람, 즉 샤먼을 주셨다고 말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하면서" 서로 "평화롭게 살고 있소. 몽케 칸은 프랑스의 루이 9세에게도 서한을 보냈다. 내용은 간단했다. 하늘에는 ‘영생의 신‘ 한 분이 계시고, 땅의 주인은 ‘신의 아들‘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을 다스리는 그의 후손들뿐이라는 이야기였다. 칭기스칸이 죽은 뒤에 첨가된, 메시아를 연상시키는 수사(修辭)를 제외하면 기본적인 내용은 몽골 제국의 창건자가 말년에 밝힌 내용과 다를 바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몽골인의 관대한 통치 밑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영생의 신의 힘으로 해가 뜨는 곳부터 지는 곳까지 온 세상이 하나가되어 기쁨과 평화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뭉게는 프랑스인을 포함한모든 기독교도에게 경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생의 신의 선언을 듣고 이해하고 나서도 우리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 산은 높고 우리 바다는 넓다‘고 하면서 그 선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믿지 않으려 한다면, 또 그런 태도로 군대를 모아 우리와 싸우려 한다면, 우리손에 혼이 날 것이다." - P258

몽골은 눈앞에 있는 재료를 즉석에서 무기로 활용하는 전통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주변에서 가장 큰 물체는 아랍인들이 수백 년에 걸쳐길러온 키가 큰 야자나무들이었다. 몽골군은 이 나무를 베어 그 줄기로치명적인 발사 무기를 만들었다. 러시아의 도시를 공격할 때와는 달리바그다드에서는 큰 도시를 둘러싼 나무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홀레구는 깊은 도랑과 누벽으로 도시를 둘러싼 뒤 무시무시하게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랍인도 전투에서 불을 뿜는 무기가 사용된다는 것은알고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화약의 힘을 경험해본 적은 없었다.
몽골군은 화약의 제조법을 바꾸어 산소를 충분히 공급함으로써 불창이나 불 화살처럼 천천히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빠르게 타오르게 만들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발화하면 불이 붙기보다는 폭발이일어났다. 몽골군은 이 폭발을 이용하여 다양한 발사체를 날렸다. 장인들은 관을 이용하여 화살촉을 비롯한 금속 발사체들을 날릴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다. 이 관은 크기가 작아 병사 혼자서 조작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관에서 폭발이 일어날 경우 대나무보다 더 강한 재료가 필요했기때문에 주로 쇠로 만들었다. 몽골군은 다루기 편하게 하려고 작은 관에는 나무 손잡이를 붙였으며, 큰 관은 이동의 편의를 위해 밑에 바퀴를달았다. 큰 관들은 도기나 금속으로 만든 상자를 발사했다. 안에는 파편들이 들어 있었다. 때로는 화약이 더 들어 있어 다른 물체에 부딪히면서 2차 폭발을 했다. 몽골군은 이런 형태의 포격 장치를 이용해 공격을 하면서 연막탄 원시적인 수류탄, 단순한 형태의 박격포, 소이탄 등도 사용했다. 또 강한 힘으로 발사체를 날릴 수 있는 폭발 장치들도 개발하여, 진짜 대포를 사용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들은 화력을 집중하여 도시 방어망 가운데 한 지역을 두들겨댔다.
이런 원거리 포격 때문에 바그다드 주민은 혼란과 공포에 빠져들었으며 수비군은 좌절감을 느꼈다. 그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의 무기가 닿을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몽골공병들은 화약무기만이 아니라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땅에 묻는 폭탄도 거의 완벽하게 운용했다. 이런 혁신적인 무기들 덕분에 몽골군은 원하던 대로 실제 전투와 살인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공격을할 수 있었다. 훌레구는 댐을 여러 개 파괴하여 티그리스 강의 물줄기로 칼리파 진영을 물바다로 만들었으며, - P268

홀레구는 기독교인 부대를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 전리품을 걷어오•게 했다. 이 부대는 많은 사람들이 소개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집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침략군은 명령 불복종을 죽음으로 다스렸다. 몽골군의 명령에 따라 도시의 교회와 기독교인 소유지는 약탈을 면했다. 흘레구는 카톨리코스 마키카에게 칼리파의 궁 하나를 주기도 했다. 바그다드 내부의 기독교도는 밖에서 들어온 기독교도와 합세하여 도시를약탈하고 무슬림을 학살했다. 기독교인들은 마침내 무슬림으로부터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수백 년에 걸친 증오와 분노가 터져나오면서기독교도는 모스크를 더럽히고 파괴했으며, 많은 모스크를 교회로 바꾸었다. 기독교인들은 압바스의 땅 전역, 그리고 그 너머에서도 승리를 축하했다. 아르메니아의 연대기 기록자는 그 기쁨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도시가 세워진 지 15년이 지났다. 이 도시는 그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늘 배가 고픈 거머리처럼 온 세상을 삼켰다. 그러나 이제 이 도시는 가져간 것을 모두 내놓았다." 바그다드는 "그 동안 뿌린 피와 그•동안 저지른 악에 대한 벌을 받았다. 그 죄악은 이미 바그다드를 가득•채우고 흘러넘칠 정도였다." 약탈은 17일 동안 계속되었다. 침략자들이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도시에는 불이 붙었다. - P270

뭉케 칸도 앓아누웠지만 서서히 회복이 되어갔다. 그러다가 1259년 8월 11일에 갑자기 죽었다. 사망 원인은 연대기마다 다르다. 중국인은 콜레라로 죽었다 하고, 페르시아인은 이질로 죽었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죽었다 한다. 어쨌든 뭉케 칸이 죽자 전진은 중단되고 제국은 그 상태에서 응결되었다.
이전의 세 대칸이 죽었을 때에는 몽골 지도자들이 서둘러 고향으로달려가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각 파벌이 이미 소유한 땅을 보호하러 나섰다. 그 무렵에는 중동에서 승리를거둔 홀레구가 제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과 도시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장악한 부는 몽골 제국의 나머지 땅의 부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는 이미 러시아를 다스리던 사촌들이 귀하게 여기던 아제르바이잔의 목초지 일부를 차지했다. 사촌들은 더 많은 땅을 잃을까 두려워 선거를 위해 몽골로 돌아가기는커녕 자신들의 영토를 꽉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않으려 했다. 중동의 홀레구나 ‘황금 오르도"-러시아에 사는 주치의 후손은 그런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그들이 이미 통제하고 있는 영토를 놓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몽골에서 대칸이라는 최고의 칭호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뭉케 이후에도 많은 칸들이 제국의 여러 지역을 다스렸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칭기스 칸의 상속자로서 대칸 칭호를 차지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다른 분파나 가문 전체가 인정한 대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뭉케 칸은 제2차 몽골 세계대전을 시작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남기지 않고 그냥 제품에 사그라졌다.
뭉케의 형제들은 가끔 원정에 나서기는 했지만 외부의 적과 싸우기보다는 서로 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쿠빌라이는 갑자기 송나라에서관심을 돌려 카라코룸에서 몽골을 통치하던 막내동생 아릭 부케에게 도전했다. 두 형제는 각각 자신의 영토에서 별도의 쿠럴타이를 열었다. 두경쟁자, 나아가서 그들 각각의 지지자들은 선명한 차이를 보였다. 쿠빌라이는 교육을 잘 받았고 중국 문화가 지배하는 농경지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황금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전적인 신임이나 인정을받은 적이 없었다. 쿠빌라이는 건물이나 도시를 더 좋아했다. 궁에 있을때도 천막에 있을 때처럼 편해 보였다. 심지어 중국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 이렇게 몽골의 전통적 생활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늘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 P276

아릭 부케는 세계주의자인 쿠빌라이와는 달리 초원지대 사람으로 살았다. 자신의 말에서 멀리 떠나가본 적이 없는 골수 몽골인이라고할 수 있었다. 그는 막내아들로서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가족의옷치긴, 즉 화로의 왕자였다. 뭉케가 그들의 아버지에게 대칸의 자리를추서했으므로 아릭 부케도 뭉케와 마찬가지로 대칸 자리에 대한 권리를주장할 수 있었다. 나아가서 아릭 부케는 황금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이각자의 땅을 다스리는 데 큰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반면 쿠빌라이는 오만한 태도 때문에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아릭 부케는 몽골 법을 따라 몽골인의 고향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몽케 칸의 미망인과 아들들은 그를 적법한 최선의 상속자로 밀었다.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두 친형제 홀레구와 쿠빌라이만 예외였다. 1260년 6월, 가족 모든 지파의 대표자들은 카라코룸의 쿠릴타이에서 아릭 부케를 대칸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빌라이는 중국인 대신들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영토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그의 추종자들외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선포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인 신하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같은 해인 1260년 대칸에 덧붙여 황제 자리에도 올라, "중앙의 통치"162) 라는 뜻으로 연호를 중(中)이라고 정했다. 이 연호는 대칸을 ‘중앙‘ 진영으로 부르고그의 군대를 ‘좌익‘과 ‘우익‘으로 부르던 몽골식 명명법을 중국식으로바꾼 것이었다.
쿠빌라이의 선출이 몽골 기준에서는 전통에 어긋났지만,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몽골 부대만이 아니라 중국 군대도 휘어잡고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카라코룸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식량 공급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몽골의 초원도시 카라코룸의 주민은 수가 너무 불어나 그 지역의 가축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외지의 농부들을 불러들이려고 꾸준히 노력했음에도 카라코룸 주위의 땅은 농업에는 적당치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카라코룸은 쿠빌라이가 장악한 농지로부터 상당량의 식량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주민을소개(疏開)하거나 굶겨죽일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식량 공급을 차단하고 군대를 보내 카라코룸을 점령했다. 아럭 부케는 거세게 저항했지만 형이 보낸 중국군의 엄청난 규모에 계속 밀렸다. 카라코룸은 곧 쿠빌라이의 손에 들어갔지만, 1261년 아부케는 잠시 카라코룸을 탈환했다. 경쟁하는 두 칸의 군대는 두 번 더 교전을 하지만 아직 부케의 군대가 점차 힘을 잃기 시작했다. 게다가 군사력도 낫고 더 똑똑해 보이기도 하는 형과 비교할 때 어린 칸에게 승산이 별로 없다고 본 동맹자들이 하나둘 떠나자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아직 부케는 몽골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과 직면했다. 주드, 즉 동물 기근이었다. 1250년부터 1270년까지 몽골에는 이상저온 현상이 나타났다. 몽골처럼 생태학적으로 취약한 지대에서는 기온이 평년과몇 도만 달라져도 그나마 얼마 안 되는 강우량이 심하게 줄어 풀의 생장이 제한되고, 그 결과 동물이 약해지거나 죽는다. 말이나 식량을 넉넉하게 갖추지 못하자 이미 쿠빌라이 칸의 영토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공급받지 못하던 아릭 부케의 지지자들은 전쟁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힘이없었다. 1263년 겨울은 특히 가혹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아릭 부케에게는 이렇다 할 권력기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추종자들에게 식량을 제공할 수 없었던 아릭 부케는 상도(上都)로 갔다가 1264년에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 P277

기나긴 싸움 끝에 형제가 만났을 때 쿠빌라이는 아릭 부케에게 공식적인 복종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다. 쿠빌라이는 조정의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동생을 심문하며 대칸의 자리를 둘러싼 투쟁에서 두 편 가운데 누가 옳으냐고 물었다. 아릭 부케의 답은 그가 패배했을망정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때는 우리가 옳았고, 지금은 형이옳소." 멀리 있는 형제 훌레구를 포함한 다른 가족은 쿠빌라이가 동생을 사람들 앞에서 욕보인 것에 화가 나 쿠빌라이에게 항의했다. 쿠빌라이는 몽골 영토에서 다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아릭 부케의 운명을결정하고, 자신도 새로 적법하게 승인을 받아 중국 땅에서 선출되었다는 오점을 씻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쿠빌라이군의 군사력이 압도적이었음에도 황금 가족은 참석을 거부했다. 쿠빌라이가 통치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인정했지만 자신들이 대칸으로 지지했던 아릭 부케를 재판하는 범죄행위에는 가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고향을 떠났다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만큼 쿠빌라이를신뢰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쿠릴타이를 열 수 있는 정족수를 채우지못하자 동생을 용서했다.  - P279

‘은 나무‘의 네 개의 샘과 마찬가지로 몽골 제국은 이제 별도의 정부를 갖춘 네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를 다스렸지만, 몽골과 만주에서는 늘 문제가발생했다. 킵착 칸국(황금 오르도에 세운 나라)은 동유럽의 슬라브 국가들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 홀레구와 그의 후손이다스리는 땅은 ‘봉신의 제국‘을 뜻하는 일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수백 년간 아랍의 지배를 통해 페르시아 문화가 다시 나타나면서 근대 이란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가장 전통적인 몽골인은 중앙의 초원지대를 차지했다. 이곳은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지금으로 치자면 북쪽의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부터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을 가로질러 남쪽의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했다. 이 지역은 한동안 우구데이와 투레게네의 손자 카이두 밑에서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부하라에서 통치하면서 쿠빌라이 칸의 권력과 대등하게 맞섰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분할되었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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