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 25일 오전 10시 30분, 오펜하이머는 대통령집무실로 안내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화술에 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라는 명성이 자자한 유명 물리학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 패티슨 장관이 그를 소개하고 나서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트루먼은 오펜하이머에게 메이-존슨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며 대화를 시작했다. 트루먼은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적 문제가 무엇인지 정하는 것입니다. 국제 문제는 그 다음이지요."라고 말을 꺼냈다." 오펜하이머는 이상하리만큼 길게 침묵을 지키다가 머뭇거리며 "어쩌면 국제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모든 핵기술을 국제적으로 통제하는 노력을 통해 신무기의 확산을 막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다. 대화 중에 트루먼은 갑자기 그에게 러시아 인들이 언제쯤 그들의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겠냐고 물었다. 오펜하이머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트루먼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은 대답을 안다고 말했다. "영원히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오펜하이머는 그와 같은 어리석음은 트루먼의 한계를 보여 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히긴보텀은 "대통령이 전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것을 보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자신의불안감을 계산된 결단을 보여 주는 것으로 감추고는 했던 트루먼에게, 오펜하이머는 지나치게 불확실했고, 애매했으며,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대통령이 자신의 메시지가 갖는 급박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감지한 오펜하이머는, 긴장한 듯 손을 비비며 나중에 후회할 만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통령 각하. 내 손에 피가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Mr. President, 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라고 말했다. - P505

1946년에 진행된 오펜하이머와 트루먼 정부 관료들에 대한 후버의조사는 반공주의 정치의 전조였다. 그는 "공산주의자", "공산주의 지지자", 또는 "동조자"라는 혐의를 무기로 정적들을 침묵시키거나 파괴했다. 그것은 사실 새로운 전술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혐의는 1930년대말부터 주 정부에서 상당한 파괴력을 가진 것으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 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지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우리의 "원자 비밀"을 지킬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기는 쉬운 일이었고, 이와 같은 필요성은 핵 관련 연구자들에 대한 극심한 감시를 정당화했다. 후버는 핵 문제에 대한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서 벗어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고, 그는 원자 에너지 정책에 관여하는사람 중 오펜하이머가 가장 혐의점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P517

오펜하이머는 이와 같은 딜레마에 대한 해법으로 현대 과학의 국제주의를 제시했다. 그는 원자력 에너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독점적으로 관장하는 국제 기구를 만들어 개별 국가들에게 혜택을 나눠 주자고 제안했다. 이 기구는 기술을 통제하고 그 기술이 오직 민간 목적으로만 개발되도록 할 것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세계 정부 없이는 영구적 평화를 얻을 수 없고, 평화가 없다면 세계는 필연적으로 핵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라고 믿었다. 물론 세계 정부는 당장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오펜하이머는 적어도 원자력에너지 부문에서만이라도 각국이 주권을 "부분적으로 포기"하기로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원자력 개발 공사(AtomicDevelopment Authority)가 전 세계 모든 우라늄 광산, 핵발전소, 그리고 연구소에 대한 소유권을 갖게 될 것이었다. 어떤 나라도 원자 폭탄을 만들지 못하게 될 것이었지만, 과학자들은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기위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었다. 4월 초에 한 강연에서 그가 설명했듯이, "이 제안은 원자력 개발 공사가 설립되어 핵무기로부터 세계를•보호하고 원자력 에너지의 혜택을 제공할 수 있을만큼만 각국이 주권을 부분적으로 포기하자는 것입니다." - P521

그래도 바루크는 벌칙 없는 법조항은 무용하다고 고집했다. 그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소련이 적어도 20년 동안은 핵무기를 만들 수 없으리라고 선언했다. 34 그러므로 그는 빠른 시일 안에 미국의 독점적 지위를 포기할 긴급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가 국제 연합에 제출하기로 마음먹은 계획은 애치슨릴리엔털 보고서를 상당히 수정한, 사실상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새로운 원자력 기구가 취하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소련은 사실상 안전보장 이사회의 거부권을 포기하게 될 것이었다. 협정을 위반하는 나라는 즉시 핵무기 공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과 관련된 기밀 정보를 제공받기 전에 그들의 우라늄 광맥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애치슨과 매클로이는 처벌 조항을 처음부터 강조하는 것에 강하게반대했다. 그들은 또한 바루크의 의도대로 핵무기에 대한 미국의 독점을 앞으로 수년간 유지한다면 계획은 성사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이 계속해서 핵무기를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이 그와 같은조건에 합의할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바루크의 제안은 원자력 에너지를 국제 협력을 통해 통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독점을 연장하려는 의도였다. 매클로이는 완벽한 국가 안보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일이며 그와 같이 엄격한 즉각 처벌 조항을 두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다음 날 대법관 펠릭스 프랭크퍼터는 매클로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아주 대단한 싸움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반대편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너무 화가 나서 ‘입에서 먼지를 내뿜을 정도였다고요." - P526

1946년 6월 14일, 바루크는 "산 자와 죽은 자(the quick and the dead)"사이의 선택이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국제 연합에 자신의 계획을제출했다. 오펜하이머와 애치슨릴리엔털 계획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소련은 즉시 바루크의 계획을 거부했다. 모스크바의 외교관들은 그대신 핵무기의 생산과 사용을 금지하는 간단한 조약을 제안했다. 오펜하이머는 키티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 제안이 "그리 나쁘지않다."라고 말했다. 누구도 소련이 바루크 제안의 거부권 행사 관련 조항에 반대한 것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키티에게 바루크는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잘 알면서도" 이 결과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낙담했는지 과장되게 말하고 다닌다고 평가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오펜하이머가 예상한 대로 소련의 제안을 거절했다. 몇 달 동안이나 협상이 계속됐지만 그저 형식뿐이었고 의미 있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로써 두 강대국은 핵무기 경쟁을 조기에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곧이은소련의 대규모 핵무기 생산이 있고 나서 1970년대가 되어서야 미국 행정부는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군비 통제 조약을 제안할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미 수만 개의 핵탄두가 생산된 후였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은 바루크 때문에 이 기회를 놓쳤다고 비난했다. 애치슨은 나중에 "그것은 (바루크의) 임무였는데 그가 일을 망쳤습니다."라고 평가했다." 라비 역시 호의적이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그 일은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 P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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