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는 세 문단으로 이루어진 짧은 추도사를 준비했다. 그는 "우리는 거대한 악과 공포의 시대를 살고 있고, 이러한 시대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전통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지도자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그답게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인간은 믿음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다. 한 인간이 믿는 바가 바로 그자신이다." 루스벨트는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이 희생된 이 전쟁이끝나면 "인간이 살기에 보다 좋은 세상"이 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오펜하이머는 다음과 같이 그의 추도사를 마무리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가시작한 일이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도록."
오펜하이머는 여전히 루스벨트가 보어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만들고 있는 신무기의 특성과 관련된 정보를 일부만 공개할 수밖에 없다는사실을 이해했기를 바랐다. 나중에 그는 호킨스에게 "글쎄, 루스벨트는위대한 건축가였고, 트루먼은 어쩌면 좋은 목수가 될 수 있겠지"라고말했다. - P445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1884~1972년)이 대통령직을 승계할 무렵, 유럽에서의 전쟁은 거의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태평양에서의 전쟁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1945년 3월 9일과 10일 저녁, 334대의 B-29기가 수톤의 젤리 가솔린(네이팜)과 고성능 폭약을 도쿄에 투하했다. 이 대공습으로 10만 여 명이 사망했고 625제곱킬로미터가 전소했다. 이를 시작으로 공습은 계속되었고 1945년 7월 무렵에는 일본의5대 도시가 공격을 받았고 민간인 사상자만 수십만 명에 달했다. 이는적국의 군사 시설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파괴하는 전면전이었다.
소이탄 폭격은 비밀이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신문에서 공습 에 대한소식을 읽을 수 있었다. 생각 있는 사람들은 대도시에 대한 전략적 폭격이 깊은 윤리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이해했다.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나는 스팀슨(전쟁부 장관)이 대일본 공습에 항의하는 미국인들의 시위가 없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도쿄의 경•우에는 대단히 많은 수의 사상자가 있었지요. 그는 공습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이 나라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했고, 그로부터 8일 후 독일은 항복했다. 세그레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첫마디는 "우리가 너무 늦었군"이었다. ‘로스앨러모스의 연구원들은 모두 "장치"를 완성시키는 작업의 유일한 정당성은 히틀러를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것이다. 세그레는 그의 회고록에 "이제 폭탄이 나치스에 사용될 수 없게 되자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라고 썼다. "이와 같은 의구심은 공식보고서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 많이 토론되었다" - P446

시카고 대학교 야금 연구소에서 레오 질라르드는 마음이 급해지고있었다. 이 떠돌이 물리학자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원자 폭탄은 곧 완성될 것이고, 그는 그것이 일본의 도시에 사용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를 만들기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한다고 처음으로 건의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핵무기의 사용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모에서 "우리의 원자 폭탄 ‘시범‘ 발사"는 소련과의 무기 경쟁을 촉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질라르드가 만날 기회를잡기 전에 루스벨트가 죽자, 그는 신임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5월 25일만나기로 간신히 약속을 잡았다. 그는 트루먼을 만나기 전에 오펜하이머에게 편지를 써서 "원자 폭탄 제조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이 나라의미래는 그리 밝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질라르드는 이와 같은 무기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명쾌한 방법이 없는 한 "일본에게 원자 폭탄을 사용함으로써 우리 패를 전부 보여 주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모르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폭탄 사용에 찬성하는 쪽의 의견을 들었지만, 그들의 주장은 "나의 의구심을 불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 P447

5월 31일 전쟁부 장관 스팀슨이 의제를 통제한 이 회의에서는 일본에 폭탄을 투하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토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결정된 것이 나 다름없었다. 스팀슨은 그 사실을 강조라도 하듯 대통령에게 군사 관련 자문을 하는 자신의 책임에 대해 개괄적인 소개를 하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폭탄의 군사적 이용에 관한 사안은 지난 2년간 폭탄을 만들어 온 과학자들의 의견과 관계없이 백악관이 단독으로 결정하게 될것임을 회의 참가자들 모두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스팀슨은 핵무기가가진 의미에 대한 토론에 귀를 기울여 온 현명한 사람이었다. 오펜하이머와 다른 과학자들은 스팀슨이 자신과 다른 임시 위원회 위원들이 폭탄을 "단지 새로운 무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서 혁명적인 변화"로 여긴다고 말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자 폭탄은 "우리를 잡아먹을 프랑켄슈타인"이 될 수도, 세계 평화를 지키는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의 중요성은 "이번 전쟁에서의 필요성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 P449

하지만 번즈는 이미 폭탄을 미국의 외교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무기설의 주장을 무시하고 로런스 편을 들었다. 그들은 "가능한 한 핵무기 생산과 연구에서 우리가 한발 앞설 수 있도록 하고 그와 동시에 러시아화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사록에는 번즈의 의견에 "참석자 모두가 대체로 동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여러 참석자들은 미국이 핵무기에서 "한발 앞서" 있으려면 필연적으로 소련과의 군비 경쟁이 촉발될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중대한 모순은 콤프턴이 "자유로운 연구"를 통해 미국의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는 동시에 러시아와 "협조적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적당히 봉합되었다. 이와 같은 애매한 결론에 도달한 채로 회의는 오후 1시 15분에 휴회하고 말았다.
점심을 먹으면서 누군가 일본에 폭탄을 사용하는 문제를 거론했다. 이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회의가 속개되었을 때 토론의 초점은 계속해서 임박한 폭격의 효력에 맞추어져 있었다. 어떤 결정이든 정치적 함의가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스팀슨은 의제를 바꿔 토론을 계속할 수 있게했다. 누군가 원자 폭탄 1개의 효력은 지난 봄 일본 도시에 행해진 대규모 공습 이상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도 여기에 동의하는듯했으나 "원자 폭탄의 시각적 효과는 대단할 것입니다. 그것은 3,000에서 6,000미터 높이의 엄청난 빛의 기둥을 동반할 것입니다. 폭발로 인한 중성자 효과는 최소한 반지름 1킬로미터 안에 위치한 모든 생명체에 위협을 가할 정도일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스팀슨 장관이 모두가 대체로 동의한 것으로 보이는 결론을요약했다. "우리는 일본에게 어떤 경고도 줄 수 없다. 민간인 지역에 집중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사람에게 깊은 심리적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스팀슨은 "가장 바람직한 목표물은 많은 노동자가 일하고 있고, 노동자 거주 지역으로 둘러싸인 중요한 군수공장"이라는 제임스 코넌트의 제안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즉 하버드 대학교의 총장은 이와 같은 근사한 완곡어법으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의 목표물로 민간인들을 선택했던 것이다. - P453

예를 들어 5월 28일, 전쟁부 차관 존 매클로이는 스팀슨에게 "무조건항복"이라는 단어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요구 사항에서 제외되도록 건의하라고 역설했다. 20 그들이 도청한 일본 기밀 전보(코드명 ‘매직‘)를 해독한 매클로이와 다른 고위 장교들은 도쿄 정부의 핵심 관료들이 워싱턴의 요구대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음을 알았다. 같은날 임시 국무부 장관 조지프 그루(Joseph C. Grew)는 트루먼 대통령과의긴 면담에서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일본 정부관료들은 단 하나의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스위스 주재 전략 정보국 요원이었던 앨런 덜러스(Allen Dulles)가 매클로이에게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천황과 헌법을 지키고 싶어 했다. 군사적 항•복이 사회 질서와 규율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216월 18일, 트루먼의 참모총장인 윌리엄 대니얼 레이히 (William DanielLeahy, 1875~1959년) 제독은 일기에 "내 의견에는 현재 일본이 받아들일수 있을 만한 조건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라고 썼다.  같은 날 매클로이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일본 군대의 상황은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 우리가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자문해야 할 정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트루먼에게 일본 본토를 침공하기 위한, 또는 원자 폭탄을 사용하기 위한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정치적인 방법으로 일본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천황과 그들이 원하는 정부 형태를 그대로 두도록 할 것"이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아가 "게다가 그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가 엄청나게 파괴적인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매클로이에 따르면 트루먼은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7월17일 무렵이면 미국의 군사적 우위는 매클로이가 일기에 다음과 같이쓸 수 있을 정도로 확고했다. "지금 경고를 보낸다면 그들이 가장 취약한 순간에 그것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목적을 이루어줄지도 모른다. 전쟁의 성공적인 종료를" - P459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에 따르면, 그는 7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폭탄의 존재에 대해 처음 듣고서는 스팀슨에게 "일본인들은 이미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런 끔찍한 무기로 그들을 타격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 역시 일본이 항복하기 일보직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통령은 1945년 7월 18일 개인 일기장에 친필로 최근 일본으로부터 도청한 "일본 천황이 평화를 요청하는 전보"에 대해 쓰고 있다. 천황은 모스크바 특사에게 보내는 이 전보에서 "무조건 항복이 평화의 유일한 걸림돌이다."라고 말했다. 트루먼은 스탈린에게서 소련이 8월 15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 둔 터였다. 트루먼은 "그는(스탈린은) 8월 15일에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끝장일 것" - P460

이곳에 육군은 가로 29킬로미터, 세로 39킬로미터의 지역을 점령하고 몇 명의 목장주들을 징발권을 발동해 퇴거시킨 후 야전 실험실과 원자폭탄의 첫 폭발을 관측하기 위한 벙커를 짓기 시작했다. 40 오펜하이머는 시험 부지를 "트리니티(Trinity)"라고 이름 붙였으나, 나중에 왜 그이름을 골랐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막연하게 "나의 심장을 쳐라,
삼위일체의 신이여."라고 시작하는 존 돈의 시를 떠올렸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다시 한번 바가바드기타로부터 영감을 얻었음을보여 준다. 힌두교 교리의 삼위(트리니티)는 창조자 브라마(Brahma), 보존자 비슈누 (Vishnu), 그리고 파괴자 시바(Shiva)였던 것이다. - P465

오전 2시 30분, 시험 부지에는 시간당 49킬로미터의 바람과 심한 천둥을 동반한 비가 내리쳤다. 허바드와 그의 일기 예보 팀은 여전히 폭풍이 동트기 전에 잦아 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는 벙커 밖에서 초조한 듯이 걸어 다니면서 몇 분에 한번씩 하늘을 보며 날씨의 변화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오전 3시경, 그들은 벙커로 들어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시험이 연기되는 것을 참을수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계획을 연기한다면 부하들이 다시 제 속도를찾게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로브스는 시험이 예정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더욱 완강하게 고집했다. 마침내 그들은 결정을내렸다. 오전 5시 30분으로 시간을 조정하고 행운을 바라겠다는 것이었다. 한 시간 후,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했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오전5시 10분, 시카고의 물리학자 샘 앨리슨(Sam Allison)의 목소리가 통제센터 바깥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제 시작 20분 전입니다."

파인만이 색안경을 건네받았을 때 그는 트리니티 부지에서 32킬로미 - P469

더 떨어진 곳에서 있었다. 그는 색안경을 쓰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대신 앨라보고도 쪽을 향하던 트럭 운전석에 올라탔다. 트럭의 창은 해로운 자외선을 차단해 줄 것이었고, 그는 섬광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엄청난 섬광이 지평선 위로 떠오르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흰색의 빛이 노란색으로 그리고 오렌지색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중심이 매우 밝은 오렌지색의 거대한 공이 떠올랐고, 약간 소용돌이치더니 가장자리가 조금 검게 변했다. 연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안쪽에서 섬광이 보였고, 불꽃과 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폭발 후 1분30초가 지나고 나서야 파인만은 거대한 폭발음과 인공 천둥의 떨림을느낄 수 있었다.
 코넌트는 빛이 비교적 빨리 나타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색 광선이 하늘을 메웠을 때 그는 잠시 "뭔가 잘못됐다."라고, "온 세상이 불길에 휩싸였다."라고 생각했다. 서버 역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땅바닥에 엎드려 용접용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팔이 아파서 안경을 잠시 내렸을 때 폭탄이 터졌다. 나는 섬광 때문에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라고 썼다. 30초쯤 후 그의 시력이 돌아왔을 때, 그는 6,000~9,000미터 높이로피어오르는 밝은 자주색 기둥을 보았다. "32킬로미터 거리에서도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폭발로 인한 방사능 낙진을 측정하는 임무를 맡은 화학자 허시펠더는 나중에 이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갑자기 밤은 낮이 되었고, 그것은 엄청나게 밝았다. 그 열기는 추위를 몰아냈다. 불덩어리는 점점•커지면서 흰색에서 노란색으로 다시 붉은색으로 색깔을 바꿨고 하늘로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약 5초 후 어둠이 다시 깔리기 시작했지만 하늘은 여전히 북극광과 같은 자주색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폭풍에 날린 흙덩이가 우리를 지나쳐 날아다녔지만, 우리는 경외감에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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