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리는 얼마 전 시카고에서 왔는데, 그곳에서 1942년 12월 2일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와 그의 연구팀은 세계 최초로 통제된 핵분열 연쇄 반응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시카고는 훌륭한 대학과 세계 수준의 도서관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숙련된 테크니션, 유리공, 엔지니어 등 기술 인력이 풍부한 대도시였다. 로스앨러모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리는 "우리는 지금 호레이쇼 앨저(Horatio Alger) 소설책밖에 없는 목장 학교 도서관과 승마 용구 등속밖에 없는 뉴멕시코의 허허벌판에 최첨단 연구소를 지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중성자 가속기를 만들기에는 가용 자원이 턱없이 부족할 것이 분명하다."라고 기록했다. 맨리는 오펜하이머가 실험물리학자였다면 "실험 물리학의 90퍼센트 이상은 사실상 배관 작업"이라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고, 이런 외딴 곳에 연구소를 지으려고 하지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업의 세부 계획은 대단히 복잡했다. 오펜하이머는 일군의 과학자들과 함께 1943년 3월 중순 무렵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오펜하이머는 베테에게 그 무렵이면 도시 설계 전문가가 과학자들이살기에 적절한 수준의 시설을 준비해 둘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주거시설로는 미혼자들을 위한 숙소와 가족을 위한 방 1개짜리부터 3개짜리까지의 아파트가 지어졌다. 이 시설에는 모든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고, 각 가정에는 전기가 공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전화는 설치하지 않았다. 부엌에는 나무를 때는 난로와 히터가 설치되었고 벽난로와 냉장고도 제공되었다. 힘든 가사 일을 돕기 위해 때때로 가정부를 부를 수도 있었다. 로스앨러모스에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학교도서관, 세탁 시설, 병원, 그리고 쓰레기 처리장이 건설되었다. 육군 영내 매점이 공동체의 식료품점과 통신 판매점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었다. 여가 생활을 담당하는 장교가 정기적으로 영화 상영과 근처 산으로의 하이킹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맥주 및 음료수, 그리고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는 주점(cantina), 미혼자들을 위한 식당, 그리고 기혼자들이 분위기 있게 식사할 수 있는 멋진 카페를만들 것이라고 약속했다. - P324

세계 최초의 핵무기 연구소에 필요한 시설을 짓고, 과학자들을 충원하며, 모든 장비들을 갖추기 위해서는 섬세하고 인내심이 있는 행정가가 필요했다. 1943년 초에 오펜하이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보다 큰 모임을 주재해 본 적이 없었다. 1938년에 그는 열다섯 명의 대학원생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수백 명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지휘해야 했고, 그 수는 곧 수천 명에 달하게 될 것이었다. 그의 동료들 역시 그가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성정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로런스 밑에서 공부하던 젊은 실험 물리학자 윌슨은 "그는 1940년 전까지만 해도 대단히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행정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지요." 1942년 12월까지도 코넌트는 그로브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과 바네바 부시는 "우리가 적당한 사람에게 지휘를 맡겼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썼다.  - P325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맡은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지만, 곧 빠르게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윌슨은 불과 몇 달 사이에 그가 카리스마넘치고 효율적인 행정가로 변신하는 것을 보며 놀랐다. 한때 괴짜 이론물리학자이자 장발의 좌파 지식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제 대단히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일류 지도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윌슨은 "그에게는 품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지요. 그는우리가 그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던 것들을 단 몇 달만에 말끔하게 털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행정적인 절차들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구심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했다.  1943년 여름 무렵이면 윌슨은 "그와 함께 있으면 내 능력 이상을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오펜하이머의 사람이 되었고, 그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 P327

그리고놀랍게도 오펜하이머는 연구소의 모든 과학자들을 육군 장교로 임관시키자는 그로브스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43년 1월 중순에 오펜하이머는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육군 기지인 프리시디오(thePresidio)를 방문해 육군 중령 계급장을 받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는 육군의 신체검사 기준치를 넘지 못했다. 육군 군의관들은 오펜하이머가몸무게가 58킬로그램으로 최저 몸무게보다 5킬로그램 적었고, 같은 키와 연령대의 정상 몸무게에 비해서는 무려 12킬로그램이나 적게 나간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그가 1927년부터 "만성적인 기침"에 시달리고있었고, 엑스선 판독 결과 폐결핵을 앓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또한 허리 디스크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했다. 약 열흘에 한 번씩 왼쪽 다리가 저리는 증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육군 군의관들은 오펜하이머를 "현역 복무 부적격"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로브스가 이미 군의관들에게 오펜하이머를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고지시해 두었기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위와 같은 신체적인 문제들에도불구하고 현역 복무를 하겠다는 메모에 서명해야만 했다. 
신체검사가 끝나고 오펜하이머는 장교용 군복을 맞췄다. 여러 가지 동기가 있었다. 어쩌면 고급 장교용 군복을 입는 것이 자신의 유태인 혈통에 대해 의식하고 있던 사람에게는 마침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42년에 군복을 입는 것은 애국적 행위이기도 했다. 전국에서 젊은 남녀들은 국가를 지킨다는 상징적 의미로 군복을 즐겨 입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의 심리는 단순했다. 윌슨은 "오피는 멍해 보이는 눈을 하고는 이번 전쟁이 이전의 전쟁들과는 다르다고 말하고는 했습니다. 이것은 자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이 전쟁이 나치스에 맞서고 파시즘을 물리치기위한 위대한 노력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인민의 군대(people‘s army)와 인민의 전쟁(people‘s war)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요•••••.그의 언어는 변한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급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이번에는 애국적인 특징을 가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았던 것입니다"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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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달 말이 되자 그로브스는 절충안에 동의했다. 23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실험 단계에서는 민간인 신분을 유지해도 좋지만, 일단 무기를 실제로 시험해 볼 수 있게 되면 모두 군복을 입도록 했다. 로스앨러모스주변은 철조망을 둘러친 육군 기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기술 구역‘안에서 과학자들은 ‘연구소장(Scientific Director)‘인 오펜하이머의 지시에따르게 되었다. 육군은 공동체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통제했지만, 과학자들의 정보 교환까지 통제하지는 않았다. 과학자들의 의견 교환은오펜하이머의 책임이었다. 베테는 오펜하이머가 육군과 벌인 협상 결과에 대해 "이제 외교 전문가가 되었군요."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 P328

오펜하이머는 라비를 로스앨러모스로 불러오지 못했던 것을 크게아쉬워했다. 그는 라비에게 연구소 부소장 자리까지 제안할 정도로 그를 참가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라비는 폭탄을 만든다는 생각 자체에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1931년에 일본군이 상하이 교외에 폭탄을 퍼붓는 사진들을 보고 난 이후부터, 폭격이라는 방식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26 폭탄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터져 버리지요. 도망갈 수가 없어요. 신중한 사람이건 죄 없는 사람이건 피할 수가 없습니다•••••. 독일과의 전쟁 도중에, 우리(방사선 연구소)는 폭격에 필요한 장비 개발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적이었고 심각한 문제였지요. 하지만 원자 폭탄을 이용한 폭격은 이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키는 것이었고, 나는 그 생각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끔찍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비는 레이더라는 훨씬 간단한 기술로도 이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었다. 라비는 "나는 그 제의에 대해 심사숙고한 끝에 거절했습니다. 나는 ‘나 역시 이 전쟁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있어. 레이더 기술이 부족하면 질 수도 있어‘라고 말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27라비는 이에 덧붙여 자신이 프로젝트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한 보다 깊이 있는 이유를 댔다. 그는 오펜하이머에게 자신은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것으로 "물리학 300년의 정점"을 찍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 말이었고, 라비는 오펜하이머처럼 철학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비가 이미 원자 폭탄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데 비해 오펜하이머에게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친구의 이의 제기를 외면했다. 그는 라비에게 "나 역시 이번 프로젝트가 ‘물리학 300년의 정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네와는다른 생각을 하고 있네. 나에게 이것은 전쟁 중에 상당히 중요한 무기를 만드는 일이야. 나치스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생각해."라고 썼다. 오펜하이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나치스보다 먼저 무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 P331

라비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일하던 일군의 물리학자들의 "사기가떨어지고 있다."라고 경고하자, 오펜하이머는 20명의 프린스턴 대학교과학자들을 한꺼번에 로스앨러모스로 데리고 오기로 결정했다. 이것은상당히 중대한 결정이 되었다. 이들 중에는 로버트 윌슨뿐만 아니라,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라는 명석하고 재기 넘치는 24세의 물리학자도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파인만의 천재성을 즉시 알아보았고, 그를 로스앨러모스로 데리고 오고 싶어 했다. 하지만 파인만의 아내 알린(Arline)은 결핵을 앓고 있었고, 파인만은 그녀를 두고 로스앨러모스로갈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파인만은 이것으로 얘기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1943년 겨울의 어느 날 그는 시카고에서 걸려 온 장거리 전화를 받았다.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뉴멕시코 앨버커키에서 알린이 머물 만한결핵 요양소를 찾아냈다고 연락한 것이었다. 그는 파인만이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하면서 주말마다 알린을 보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파인만은 감동을 받았고 오펜하이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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