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후, 오펜하이머와 키티는 슈발리에 부부에게 대단히 어려운 부탁을 했다. 오펜하이머는 키티에게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가 키티와 함께 페로 칼리엔테로 한 달간 휴가를 가 있는 동안 슈발리에 부부가 태어난 지 두 달된 피터와 그의 독일인 보모를 맡아 줄수 있을까 하는 부탁이었다. 슈발리에는 이 부탁을 오펜하이머가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증으로 받아들였다." 슈발리에 부부는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피터를 한 달이 아니라 두 달동안 맡아 주었다. 이로써 키티와 오펜하이머는 가을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떠나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머니와 아기 사이의 관계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키티는 피터와 제대로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1년이 지난 후에도, 친구들을 아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자랑하는 것은 항상 오펜하이머였다. 한 옛 친구는 "키티는 무관심한 듯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P265

1939년 1월 29일 일요일, 어니스트 로런스와 가깝게 일하던 전도유망한 젊은 물리학자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Luis Walter Alvarez, 1911~1988년)는<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을 읽으며 머리를 깎고 있었다. 그는 두 명의독일 화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 1902~1980년)이 우라늄 원자핵을 2개 이상으로 쪼갤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실험에 성공했다는 뉴스 통신사 기사를 읽었다. 그들은 가장 무거운 원소 중하나인 우라늄을 중성자로 때림으로써 핵분열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소식에 놀란 앨버레즈는 "이발이 끝나기도 전에 한달음에 방사선 연구소까지 뛰어가 소식을 전했다. 그가 오펜하이머에게 소식을 전했을 때 그의 대답은 "그건 불가능해."였다. 오펜하이머는 칠판으로 가서 핵분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누군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앨버레즈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그 실험을 성공적으로 재현했다. "나는 오펜하이머를 불러서 매우 작은 자연 상태의 알파입자의 파동과 25배나 큰 핵분열 파동이 나타나는 것을 오실로스코프를 통해 보여 주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곧 이 반응이 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중성자를 이용해 더 많은 우라늄 원자를 쪼갤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해 전력을 생산하거나 폭탄을 난들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의 생각이 얼마나 빨리 전개되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었지요." - P267

이기오펜하이머는 1941년 가을에 노조 문제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방사선 연구소의 과학자들을 노조로 결성한다는 계획 자체가 폐기된 것은아니었다. 약 1년이 지난 1943년 초, 로시 로마니츠, 어빙 데이비드 폭스(Irving David Fox), 데이비드 봄, 버나드 피터스, 그리고 막스 프리드먼은노조(FAECT 25호 지부)에 가입했다. 이들은 모두 오펜하이머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사실상 노조를 결성할 이유가 없었다. 예를 들어 로마니츠는 방사선 연구소에서 150달러의 월급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예전에 받던 봉급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노동 조건에 대한 불만도 없었다. 모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일할 용의가 있었다.
로마니츠는 "그것은 뭔가 극적인 일 같았습니다. 젊은 시절에 해 볼만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노조를 결성하는 이유로는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프리드먼은 로마니츠와 와인버그의 설득에 넘어가 방사선 연구소의 조직책이 되었다. 그는 "이름만 그렇지 나는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었어요."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노조를 결성하는 것이 원칙적으로는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원자 폭탄이 무엇에 사용될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노력이 어떻게 이용될지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상황에서는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P281

오펜하이머는 10월 21일에 스케넥터디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고, 효과적인 무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우라늄 235의 양에 대한 그의 계산 결과는 워싱턴으로 보내는 최종 보고서의 핵심 부분이 되었다. 그의계산에 따르면 폭발적 연쇄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100킬로그램 정도의 우라늄만 있으면 충분했다. 코넌트, 콤프턴, 로런스 등 몇 명만이참석한 이 회의는 오펜하이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치스 군대가이미 모스크바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낙담한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전쟁 준비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는 레이더를 연구하던 동료들을 부러워했다. 그는 나중에 "하지만 기초적인 원자력 에너지 연구를 하는것을 직접 보고 나서야 내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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