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사라진 정복자

칭기스 칸은 행동하는 사람이었다.-워싱턴 포스트 (1989)

1937년 몽골 중부의 거무스름한 샹크 산맥 아래를 흐르는 ‘달의 강‘ 가 어느 절에서, 칭기스 칸의 영혼이 사라졌다. 충성스런 라마승들이 수백년 동안 보호하고 경배해오던 영혼이었다. 1930년대에 스탈린의 심복들은 여러 차례 몽골의 문화와 종교를 공격하여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약 3만 명의 몽골인을 처형했다. 군대는 사원을 차례차례 짓밟았다. 승려를 사살하고, 여승을 폭행하고, 종교 유물을 부수고, 도서관을 약탈하고, 경전을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누군가 샹크 사원에서 칭기스 칸의 영혼의 상징물을 몰래 빼냈고, 수도 울란바토르의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으나, 결국 그곳에서도 사라졌다고한다. - P11

몽골군은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면서 전쟁을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펼쳐진 다수의 전선에서 벌이는 대륙간 사업으로 바꾸어놓았다. 칭기스 칸의 혁신적인 전투 기술로 인해 중세 유럽의 중무장한 기사는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고, 전체에 통합된 단위를 이루어 움직이는 규율 잡힌 기병이 전면에 나섰다. 칭기스칸이 방어용 요새에 의존하는 대신 기습을 기발하게 활용하고 공성전을 완벽하게 다듬어 운용하자, 성벽을 두른 도시의 시대도 끝이 났다. 칭기스 칸은 오랜 기간 원정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민족에게 엄청나게 넓은 공간에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그 결과 몽골군은 세 세대가 넘게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칭기스칸은 아들, 손자들과 함께13세기에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문명들을 정복했다. 그가 굴복시킨 사람들 숫자로 보나, 합병한 나라들의 숫자로 보나, 정복한 땅의 면적으로보나 칭기스칸은 역사상 다른 어떤 정복자보다 두 배 이상을 정복했다.
몽골 전사들의 말발굽은 태평양부터 지중해까지 모든 강과 호수의 물을밟아보았다. 전성기 몽골 제국은 연속되는 면적으로 2800만 내지 3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대략 아프리카 대륙만한 넓이며, 미국, 캐나다,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섬들을 합친 면적보다도 훨씬 넓다. 몽골 제국은 눈 덮인 시베리아 툰드라부터 인도의 뜨거운 평원까지, 베트남의 논에서부터 헝가리의 밀밭까지, 고려에서부터 발칸 제국까지 뻗어 있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다수가 한때 몽골이 점령했던 나라에 살고 있다. 현대 지도에서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이런 성취에서 가장 놀라운 측면은 그의 휘하에 있던 몽골 부족 전체가 약 100만 명으로, 현대일부 기업의 직원들보다 적은 수였다는 점이다. 칭기스 칸은 이 100만명에서 군대를 징집했는데, 그 수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현대의 대형경기장도 꽉 채우지 못할 숫자였던 것이다. - P14

칭기스 칸의 기병대가 13세기를 가로질러 돌격하자 세계의 경계가다시 그려졌다. 칭기스 칸은 돌이 아니라 나라로 건축을 했다. 칭기스칸은 다수의 작은 왕국들로는 만족을 못했는지 작은 나라들을 합쳐서큰 나라로 만들었다. 몽골군은 동유럽에서 슬라브족의 공국과 도시 여남은 개를 묶어 하나의 커다란 러시아 국가를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는 3대에 걸쳐 남쪽의 송나라에 만주의 주르첸(여진을 가리킨다), 서쪽의 티베트, 고비 사막 옆의 탕구트, 투르키스탄 동부의 위구르의 땅을 결합하여 커다란 중국을 만들었다. 몽골은 통치 영역을 확대하면서 인도도 통치했다. 인도는 대체로 몽골 정복자들이 세운 경계 안에서 현대까지 생존해왔다.
칭기스 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태어난 1162년, 구세계는 여러 지역문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각각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 외에는 다른 문명을 거의 알지 못했다. 중국은 유럽을 몰랐고, 유럽은 중국을 알지못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중국과 유럽 사이를 여행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사망한 1227년에 중국과 유럽은 외교나 상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 P16

칭기스 칸은 귀족적 특권과 출생에 기초한 봉건제를 부수고 개인의장점과 충성심, 성취에 기초한 새롭고 독특한 체제를 건설했다. 그는
‘비단길‘ 주변에 고립되어 있는 굼뜬 교역도시들을 점령하여 비단길을역사상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로 조직해놓았다. 칭기스 칸은 전체적으로세금을 내렸으며, 의사, 교사, 사제, 교육기관에는 완전히 면제해주었다. 정기적으로 통계조사를 했고, 처음으로 국제적인 역전(傳) 제도를확립했다. 몽골은 부와 보물을 축적하는 제국이 아니었다. 대신 칭기스칸은 전투에서 얻은 물자를 널리 분배하여 다시 상업적 유통망으로 들어가게 했다. 칭기스 칸은 국제법을 만들고 ‘영원한 푸른 하늘‘의 법을만민을 다스리는 궁극적인 최고의 법으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통치자가 스스로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 칭기스 칸은 통치자도 미천한 목자와 똑같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복당한 모든 신민에게 종교와 관계없이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지만, 영토 내에서 종교적자유를 허용했다. 법의 지배를 내세우고 고문을 철폐했지만, 양민을 습격하는 도적떼나 테러리스트 암살자들을 찾아내 죽이기 위한 대규모 원정에는 서슴없이 나섰다. 그는 볼모를 잡아두는 관행을 없애고, 대신 모든 대사와 사절에게 외교적인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관행을 수립했다. 전쟁 중인 적대국가의 사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칭기스 칸은 제국을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두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제국은 그 뒤에도 150년 동안 더 팽창해나갔다. 제국이 붕괴한뒤에도 수백 년 동안 그의 후손은 러시아, 터키, 인도에서 중국과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작은 제국과 큰 나라를 다스렸다. 이 통치자들은 칸, 황제, 술탄, 왕, 샤, 아미르, 달라이 라마 등 다양한 절충적 칭호를 사용했다.  - P17

그들은 칭기스 칸을 고향 땅에 비밀리에 묻은 뒤 그 주변 수백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폐쇄했다. 특별히 훈련받은 전사들이 침입자를 죽이는임무를 부여받고 그 땅을 지켰으며, 칭기스 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시아 심장부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이후 호리그, 즉 대금구(區)‘는 거의 800년 동안 폐쇄되어 있었다. 칭기스 칸제국의 모든 비밀이 그의 신비한 고향에 모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몽골 제국이 무너지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외국 군대가 몽골의 여러 지역을 침입하기도 했지만, 몽골인은 조상의 성지에는 아무도 발을들여놓지 못하게 끝까지 막았다. 몽골인이 불교로 개종하는 과정에서많은 사건이 발생했지만, 칭기스 칸의 후계자들은 성직자가 그의 매장지를 표시할 사당이나 절이나 기념물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세기에는 소련 통치자들이 칭기스 칸의 탄생지나 매장지가 민족주의자들의 집결지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지켰다. 소련 사람들은 이곳이 칭기스 칸과 관련이 있다는 암시를 줄까봐 대금기라는 말이나 다른 역사적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접근 금지구역‘ 이라는 관료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행정 체제에서도 이곳을 주변 지역과 분리하여 중앙정부의 직접 관할 지구로 돌렸다. 물론 몽골 중앙정부는 모스크바의 통제를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소련은 접근 금지구역 주변의 100만헥타르를 ‘접근 제한구역‘으로 설정하여 봉쇄했다. 공산주의자들이지배하던 시기에 정부는 이 지역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아예 도로나 다리를 건설하지 않았다. 소련은 제한구역과 몽골의 수도울란바토르 사이에 요새화된 미그기용 공군기지를 건설했다. 아마 핵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커다란 소련 탱크 기지까지 생겨 일반인이 금지구역으로 들어가기란 실제로 불가능했으며, 러시아 군부는 이 지역을 포병과 탱크 훈련장으로 이용했다. - P19

칭기스 칸의 진실은 이런 수많은 정치적 수사(修辭), 사이비 과학, 학자의 상상 속에 묻혀 후대 사람들은 그것을 영영 알 수 없게 되어버린것 같았다. 20세기 공산주의자들은 그의 고향과 그가 권력의 자리에 올라섰던 지역을 폐쇄해버렸다. 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그곳을 지켜온전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땅을 물샐 틈 없이 봉쇄했다. 이른바 「몽골 비사元朝秘史.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라는 이름의 몽골 문건은 비밀인 것만으로 모자랐는지 아예 사라져버렸다. 칭기스칸의 무덤보다더 신비하게 역사의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춘 것이다.

[「몽골 비사와 함께 부활하다]
20세기 들어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지면서 칭기스 칸의 수수께끼 가운데일부를 해결하고 기록도 정정할 예기치 않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우선 칭기스칸의 사라진 역사가 포함된 귀중한 원고를 판독하게 되었다. 몽골인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학자들 사이에서는 칭기스 칸의 삶을 기록한 전설적인 몽골 텍스트를 본 적이 있다는이야기가 가끔 흘러나왔다. 멸종되었다고 여겨지는 희귀동물이나 귀중한 새의 경우처럼 그 텍스트를 보았다는 소문은 학문적 열의보다는 오히려 회의적 태도를 자극했다. 그러다 마침내 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문서 사본이 한 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한자 자체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한자들은 13세기의 몽골어 발음을 옮겨놓은 일종의 암호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각 장에 딸린 간략한 한문 요약문만 읽을 수 있었다. 이 요약문을 통해 텍스트에담긴 이야기의 암시는 얻을 수 있었지만, 문서 전체의 내용은 해독할수 없었기 때문에 감질만 날 뿐이었다. 이 문건을 둘러싼 수수께끼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을 『몽골비사』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후 이 문건의 이름이 되었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몽골에서 「몽골비사」의 판독은 목숨을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일반인이나 학자들이 이책을 손에 넣지 못하게 막았다. 이 텍스트의 낡고, 비과학적이고, 비사회주의적인 관점이 부적절한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골비사」를 둘러싸고 지하 학술 운동이 전개되었다.  - P27

 소련은 위성국가가 독립적인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는 나아가 예전에는 동맹자였지만 이제는 소련의 적이 된 몽골의 다른 이웃인 중국 편을 들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자 화를 내며 비합리적으로 대응했다. 몽골 공산주의자들은 우표의 발매를 금지하고 학자들을 탄압했다. 당 간부들은 투무르-오치르가 "칭기스 칸의 역할을 이상화하는 경향을 드러내는 반역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를 공직에서 쫓아내고 외딴 곳으로 추방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끝내는도끼로 찍어 죽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정당(공식 명칭은 인민혁명당이다) 내부 인사들을 숙청한 뒤 몽골 학자들의 작업으로 관심을 돌렸다. 당은 그들에게 "반당분자, 중국의 첩자, 방해공작을 벌인 자들, 해충) 등의 낙인을 찍었다. 그 뒤의 반민족주의 캠페인 과정에서 당국은고고학자 페를레를 감옥에 보냈다. 페를레는 투무르-오치르의 스승이라는 이유, 몰래 몽골 제국의 역사를 연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엄혹한 조건에서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교사, 역사학자, 화가, 시인, 가수들 역시 칭기스칸 시대의 역사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만 있으면 험한 꼴을 당했다. 실제로 당국은 몇 사람을 비밀리에 처형하기도 했다. 어떤 학자들은일자리를 잃고 가족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 한데서 몽골의 가혹한 날씨와 마주해야 했다. 이들은 아파도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방대한 몽골 땅 여러 곳에 흩어진 추방지까지 걸어가야 했다.
이 숙청 기간에 칭기스 칸의 영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어쩌면 소련이 몽골인을 응징한다며 파괴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야만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런 탄압 때문에 수많은 몽골 학자들이 독립적으로 『몽골 비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비방과 왜곡에 시달리던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이다. - P29

몽골군은 역사상 다른 모든 대군과는 달리 보급품 수송대 없이 가볍게 움직였다. 그들은 사막을 건널 수 있는 가장 추운 달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때는 사람이나 말이나 물 소비도 적었다. 이 철에 맺히는 이슬 때문에 잘 자라는 풀이 있었는데, 이것은 말의 먹이가 되었을 뿐아니라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사냥감들도 끌어들였다. 몽골인은빠르게 움직일 수 없는 공성(城) 무기나 무거운 장비를 가지고 다니는대신 기동성이 좋은 공병대를 구성하였으며, 이들은 현장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필요한 시설을 만들었다. 광대한 키질쿰 사막을 건넌 몽골군은 나무들이 처음 눈에 띄자 그것을 잘라 사다리, 공성무기를 비롯하여 공격에 사용되는 여러 장비를 만들었다. - P42

 칭기스 칸은 어떤 도시를 상대로 심리전을 준비할 때 주민의 앞일을 보여주는 두 가지 예부터 제시했다. 그는 외진 마을에 관대한 항복 조건을 내걸었으며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몽골군에합세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다. 주베이니의 말에 따르면 "그들에게 항복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안전하게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있었으며, 수치스러운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절하는 사람은 매우 가혹한 대접을 받았다. 몽골군은 그들을 앞장세워 다음 공격의 방어벽으로 이용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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