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 야영을했을 때 오펜하이머는 먹을 것이 떨어졌고, 누군가가 허기를 없애기 위해 파이프를 피워 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이때부터 평생 파이프와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 P76

오펜하이머가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Laboratory)에 도착한 것은 전 세계 물리학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1920년대초, 닐스 보어와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년) 등 유럽의 몇몇 물리학자들이 양자 물리(또는 양자 역학)라는 이론을 만들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양자 물리는 분자와 원자 크기의 매우 작은 규모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적용되는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양자 이론은 곧 수소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 같은, 원자보다 작은 규모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고전 물리학을 대체하게 될 것이었다. 5유럽에서 물리학 분야의 거대하고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오펜하이머는 물론이고 대다수의 미국 물리학자들은 이를 깨닫지못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나는 그저 학생에 불과했습니다. 나는 유럽에 도착하기 전까지 양자 역학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유럽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전자 스핀에 대해 배웠어요. 1925년 봄무렵이면 미국에는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미국에 있을 때 나는 전혀 무지한 상태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 P78

친구들과 가족들이 우려하는 가운데, 오펜하이머의 심리 상태는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그는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고 뚱한 모습을 보이는일이 잦아졌다. 특히 그는 자신의 지도 교수 블래킷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22 오펜하이머는 블래킷을 좋아했고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블래킷은 실험 물리학자였고,
실험실에서 일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며 오펜하이머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블래킷은 별 생각 없이 그랬을지 모르지만, 불안한 심리 상태에놓여 있던 오펜하이머에게는 이것이 근심의 원천이 되었다.
1925년 늦가을에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정신적인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나머지 너무나 멍청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블래킷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불만이 쌓이자, 그것은 곧 강한 질투심으로 이어졌다. 오펜하이머는 실험실에서 구한 화학 약품을 이용해 만든 "독"을 사과에 발라 블래킷의 책상에 올려 두었다. 와이먼은 나중에 "그것이 상상의 사과였든 진짜 사과였든, 그의 행동은 질투심의 발로였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블래킷은 사과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 당국이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오펜하이머가 두 달 후 퍼거슨에게 고백했듯이, 그는 자신이 지도 교수에게 독을 먹이려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리고 그는 실제로 청산가리를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교수가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만약 오펜하이머가 발랐다는 "독"이 치명적인 것이었다면, 그의 행동은 살인 미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사태 전개를 보면, 그 정도로 심각했던것 같지는 않다. 오펜하이머는 아마도 구토를 나게 하는 정도의 물질을 사과에 발랐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는 퇴학을 각오해야 할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다.
오펜하이머의 부모는 아직 케임브리지에 머물고 있었고, 대학 당국은 즉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렸다. 율리우스 오펜하이머는 형사 처벌만은 면하게 해 달라고 대학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 기나긴 협상 끝에, 오펜하이머를 기소유예 상태에서 런던에서 유명한 할리 가(Harley Street)의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게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에티컬 컬처 스쿨 시절 오펜하이머의 스승이었던 스미스가 말했듯이 "그는 정신과 의사와 정기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조건으로 케임브리지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 P84

그 책은 오펜하이머의 고뇌하는 영혼에 답을 주었던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년)의 신비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e)』였다. 오펜하이머가 나중에 버클리 시절의 친구 슈발리에에게 말했듯이, 그가 이 책을코르시카를 헤매고 다니던 어느 날 밤 손전등 밑에서 읽었던 것은 그의인생에서 가장 멋진 경험들 중 하나였다. 프루스트의 작업은 자기 성찰에 관한 고전 소설이고, 그것은 오펜하이머에게 깊고 항구적인 인상을남겼다. 오펜하이머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잔인함을 논하는 구절을 외워 슈발리에를 놀라게 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주는 고통에 무관심할 수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악함이 그토록 드물고, 비정상적이며, 소외된 상태가 아니고 심지어 그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은 무관심을 지칭하는 단어는 여럿 있지만, 결국은 끔찍하고 영구적인 형태의 잔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코르시카에서 오펜하이머는 이 글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읽으면서자신이 남에게 끼치는 고통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통찰이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내면에 대해 추측만 할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어쩌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죄의식에 가득 찬 어두운 생각들이 활자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며 자신의 심리적 부담을 덜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런 생각이 인간 조건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서는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혐오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수있었다. 그리고 지식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정신과 의사의 도움 없이 독서를 통해서 우울증이라는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자기 위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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