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가 나이 먹어서 보이게 되는 정치적 감성은 그가 애들러의 학교에서 받은 진보적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창 성장기였던 시기에 그는 자신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촉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20세기 초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윤리 문화 협회 회원들은 인종 문제, 노동자권리, 시민의 자유, 환경주의 등 여러 정치 쟁점들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예를 들어 1909년에 윤리 문화 협회의 저명한 회원들이었던 헨리 모스코비치(Henry Moskowitz) 박사, 존 러브조이 엘리엇(JohnLovejoy Elliott), 애너 갈린 스펜서(Anna Garlin Spencer), 그리고 윌리엄 솔터(William Salter) 등은 ‘전국 유색인종 지위 향상 협회(National Association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의 창립을 도왔다. 모스코비치 박사는 또한 1910년과 1915년 사이에 일어난 의류 노동자 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른 회원들은 ‘미국 시민 자유 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Union)‘의 전신인 ‘전국 시민 자유 사무국(National Civil Liberties Bureau)‘의 창립을 도왔다. 협회 회원들은 계급 투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실용적 급진주의자들로서 사회 변화를 가져오는 데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위해서는 고된 일, 끈기, 그리고 정치 조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1921년오펜하이머가 에티컬 컬처 스쿨을 졸업하던 해에 애들러는 학생들에게 "윤리적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를" 보라고 훈계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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