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에서 그 연락을 받은 건 내가 하던 일을 막 때려치우고돌아나와 집 앞 편의점에서 투 플러스 원 맥주를 계산대에 올려놓았을 때였다.
기세 좋게 던지고 나왔다는 건 내 기준이고, 실은 스프리트검내지 아크릴 파우더와 리퀴드 라텍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재료가담긴 통들이 내게로 날아온 게 먼저였다. 나 맞으라고 던지는 게아니며 방향만 내 쪽일 뿐 벽이나 바닥을 겨냥하는 줄은 알겠고 평소에도 종종 날아오던 건데 왜 그날따라 머리꼭지라도 따인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장이 던진 알루미늄포일 통이 결정타인지 도화선인지 아무튼 뭔가가 되어버렸다.  - P9

극 초반에 어느 허방에 빠지거나 벼랑에서 떨어지거나 여러 방식 가운데 한 가지로 퇴장당하고 말, 조연 이하의 존재. 웬만하면 메스를 잡아서는 안 되지 싶은 늙은 의사가 홀로 진료하던 지역 유일의 산부인과에서 꼭 지금내 나이 때 나를 낳지 않고 혼자서 자유롭게 날아올랐다가 사라졌어야 마땅할, 나의 엄마. 이 생명을 부여했다는…… 이런 세상에 토해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그리 고맙지 않은, 나의 엄마.
그런 엄마가 쉽지도 않은 발음을 여러 번 해가면서 찾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 만약 장소나 사물 아닌 사람 이름이라고 한다면, 은인을 찾는 건지 원수를 갚겠다는 건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이 경우 보통은 은인 쪽에 베팅하는 본능 또한 젊은 자식의 선입견에서 비롯한 것일까. 사람이 아무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세상을 붙든 손아귀의 악력도 빠져나가고 웬만한 건 초탈하게 되겠지. 마디마다 바람구멍이 나서 몸의 형태를 간신히 유지하는 뼈와 축 늘어진 근육 그 어디에, 원한이라는 강렬하고도 에너지 소모가 심한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남아 있겠나 싶은 단견 말이다. 나만해도 실장에게 글루건 말고 딱히 던진 게 없을 만큼, 증오보다는 연민과 허무에 가깝지 않나 싶은 마음으로 돌아나왔는데. - P17

수없이 흥행에 실패한 SF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들, 그 어느 장르보다 고난도의 특수 분장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무수히 복제 가능한 대체재가 넘쳐나는 영화들 사이사이에 니니코라치우푼타의 파편이 있었다. 그것은 엄마가 유년에 실제로 만난 외부의 방문객 혹은 젊은 날 쌓아올린 수많은 지성과 교양의 성채에 금이 가서허물어진 뒤, 베수비오 화산의 유적지와도 같은 인지 공간에 남아 있는 스키마를 동원하여 말년에 조악한 상상으로밖에 빚어낼수 없었던, 세상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 누구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세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기원전 신화의 끝자락에서 왔을지도모르는 이름. 낱낱의 발음을 입속으로 찬찬히 굴리는 동안 그것은일자一子-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 - P60

민주는 딸의 상태를 보고, 무엇을 보았는지 혹은 겪었는지 모르지만 충격을 받아서 그럴 뿐 얼마쯤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무의식의 바다에 쓰레기를 투척한 자를 잡는 건 나중 일. 그 바다 안에서는 무의미와 유의미의 원생생물이 흘러가고 그중 극히 일부의 사고만이 육지로 올라와 사람의 말로 진화한다. 마, 마아, 무, 엄, 암, 엄마. 보통의 존재가 태어나 처음 배우는 말. 그 말이 다정의 입 밖으로 태어나기 위해 형태를 막 갖추려는 순간, 아직 누구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심해어의 송곳니가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말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기라도 한 듯 신음만 조금 나오다 말아버린다. 제 목을 스스로 졸라도•보고, 답답한지 가슴도 쳐보는데 기침과 외마디 음절 이상은 끝내 들을 수 없다.  - P66

차라리 태블릿에 입력을 시도했을 때가 그나마 음소라도 나열되어 언어와 비슷했을까. 이번에는 더욱 알아볼 수 없는 선과 점, 도형도 글자도 되지 못한 파편들이 종이 위에 그어진다. 손에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뇌에서 떠오른 말들이 손까지 도착하기 전에 누군가가 회로를 차단한 것 같다. 말을 떠올리고 사용해야 할 뇌의 공간을 공포와 경악이라는 즉물적 감각에 통째로 양보한 것처럽. 양보가 아니다. 약취, 침탈, 점령당한 사고의 맥분이 말의 빵으로 빚어지지 못한다. 말이 혀뿌리에 걸려 부서지고, 말을 형상으로 방출할 글자가 뇌리에서 증발하는 증상을 부르는 이름이 있을까? 이것을 실서증의 일종이라고 보아도 될까?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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