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 것밖에 안 쓰는데 이 미국 콘돔은 뭐야? 누구랑 쓰던 거야?"
그 순간에 웃으면 안 되었는데, 수경은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아서..... 끝내는 잘 달랬지만 남자친구가 너무 시무룩해지는 바람에 진땀을 빼야 했다. 미안하진 않았다.
수경은 사과할 필요 없는 일에 사과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런 종류의 판단을 스스로깨쳤다. 하여간 대한민국 성교육 실태는 참담한 수준임이분명했다. 수치심을 가져야 할 순간에 갖지 않도록, 가지지 않아야 할 순간에 갖도록 잘못 가르치고 있다. 폴리우레탄의 축복을 받지 못한 나라 같으니라고.  - P382

"아부 듣기 좋군요. 나는 충고 같은 거 하기 정말 싫어하지만 소 선생이 원하는 것 같으니까 말해주는 거예요. 충고가 제일 싫어. 나는 자격도 없고 그냥•••••• 우리가 하는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
"그겁니다. 여전히 훌륭한 학생이군요. 물론 자꾸 잊을겁니다. 가끔 끔찍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또 던질 겁니다. 소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 P469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빈 땅을 보고도 그날밤을 기억했다. 평범한 붉은 흙으로 메워지고 다져진 부지에 이제 존재하지 않는 건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가장자리를 밟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 근처였다. 버스를 타러 갈 때마다 비어 있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8층짜리 기억에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곳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데는 몇년이 채 걸리지않았다. 약국과 체인 음식점, 학원과 렌털 회사들, 헬스 클럽과 요가 강습소, 치과와 보험 회사가 입주했다. 지하에는 그전 계획처럼 슈퍼마켓이 들어왔다. 중소도시에 흔하디흔한 정글 같은 대형 상가였다. 1층 엘리베이터 옆의 층별 안내도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 앞에 서서 이 건물에 극장이 있었던가, 헷갈려 하는이들이 종종 있었다. 극장은 그들의 착각 속에서 몇초간 존재했다가 다시 사라졌다. - P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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