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은 스스로가 단단한 부품임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중을, 타인의 생명이라는 무게를, 온갖 고됨과 끝없는 요구를 견딜 수 있는 부품이란 걸 어떤 자기애도 없이건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손바닥 위의 티타늄 볼트를 내려다보듯이 아무렇지 않게 말이다. 어려운 구석에 놓여도 기능할 수 있는 조각이니까, 제 역할을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실제로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태도는 언어가아닌 형태로 채원의 머릿속 어딘가를 흐르고 있었다. 운동선수가 결심을 매번 언어로 하지 않듯이.  - P76

같은 사람들이다.
그 짧은 문장이 갑자기 떠올랐다. 떠오르고 나서 이해가되었다. 같은 사람들이었다. 토대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학을 통폐합시킨다. 보이는 토대와 보이지 않는 토대를 다지지 않고 허무는 사람들 말이다. 발밑으로 모래가 흘러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그리하여 입을 벌린 구덩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등을 뒤에서 밀어버리는 사람들…… 같은 사람들이야, 말해주고 싶었다. 말해야할 것 같았다. - P135

 요즘 젊은이들은 존경할 만한 어른이 몇 없어서 조금만 멋져 보여도 신이나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주목받는 게 싫지는 않기 때문에 좋은 트위드 재킷을 입고 일주일에 한번쯤은 근사한 모자도 쓰고 출근한다. - P139

"그렇게 울다가 얼굴에 구멍이 나겠구나."
누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누구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사람 말이 맞았다. 정말로 구멍이 생겼다. 얼굴에는 아니지만 어딘가에 구멍이 있다. 영린은 자주 구멍의 존재를 느끼곤 한다. 엄마가 죽으면서 최초의 작은 구멍이 만들어졌고, 끝없이 우는 과정이, 누군가 찾아온 사람이 영린을 두고 불쌍하다고, 불쌍해 죽겠다고 쓰다듬는 과정이그 구멍을 계속 넓혀왔다. 가장자리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면서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 P147

어떤 설명도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영린이 몇년 동안 찾아낸 설명은, 새엄마가 비극을 처리하는 하수처리장 같은 걸 잘 갖춘 사람이라 순식간에 약을 풀고 필터를 돌려 비극을 비극 아닌 것으로 처리해낸다는 것이었다. 본인에게는 그만큼 좋을 수 없겠지만 가끔은 좀 부적절할 때도 웃는 사람이었다. 만약 영린이 남자친구와 헤어진 일로 울고 있으면 곁에서 얼마나 웃어댈지 상상하는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있잖아, 마음에 갈증 같은 게 있는 사람은 힘들다?"
영린과 함께 산지 얼마 안 되어 새엄마가 말했었다.
"네?"
"그런 사람은 항상 져. 내가 보기엔 네가 힘든게 몸무게때문도 아냐. 마음 때문이야."
그걸 지적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둔하디둔한 아빠가 똑똑한 아줌마와 결혼했구나, 영린은 약간 울면서 감탄했다. 갈증, 허기, 구멍은 모두 같은 걸 가리켰다. 영린의 안쪽에 있는 그 비어 있는 곳.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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