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의 정보 저장 기술은 디지털 방식이다. 이 사실은 19세기에 그레고어 멘델이 발견했다. 비록 그가 이런 식의 설명을 하지는 못했지만말이다. 멘델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가 자손의 몸에서 잉크와 물이 섞이듯 뒤섞여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자손은 부모로부터 여러 가지 유전자를 받을 때, 그것들을 구분된 입자의 형태로 받는다. 각각의 입자에 관해 말하자면 자손은 그것을 물려받든가 물려받지못하든가 둘 중 하나다. 오늘날 신다원주의이라 불리는 사조를 일으킨 선구자 중 한 사람인 R. A. 피셔는 입자 형태의 유전이라는 이 사실은우리가 자손의 성별에 관해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임을 지적했다.
우리는 남성인 아버지와 여성인 어머니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지만 양성 또는 중성이 아니라, 항상 남성 아니면 여성이다. 새로 태어날 아기가 남성이 될 확률과 여성이 될 확률은 거의 똑같다. 그러나 항상 아기는 이 두 성별 중 한 가지를 가질 뿐 2개의 성이 혼합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제 다른 유전 입자에서도 마찬가지 사실이 적용된다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뒤섞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구분된 채로 있으며 세대를 거쳐 내려가는 동안 카드들이 섞였다가 다시 분리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물론 유전 단위들이 한 몸 안에 있을 때 마치 잉크가 물에 섞이는 것과 같은 현상을 나타내는 일이 종종 있다. 키가 큰 사람이 키가 작은 사람과 결혼했을 경우, 또는 흑인이 백인과 결혼했을 경우 그들의 자손은 중간형을 띤다. 그러나 잉크가 물에 섞이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단지 겉보기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는 각자 작은효과를 나타내는 많은 수의 유전 입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이다. 입자들 각각은 분리된 채로 남아 있으며 다음 세대로 그대로 이어진다.
유전이란 물과 잉크가 섞이는 것과 같다는 생각과, 그것이 아니라 유전자는 중간에 뒤섞이거나 소멸되지 않는 입자의 형태로 다음 세대로넘어간다는 생각을 구분하는 것은 진화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P193

어떤 한 정자 속에 있는 모든 장소는 다른 나머지 정자 속에들어 있는 특정한 장소들에 각각 대응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난자나정자와 비교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세포들(체세포)은 모두 46개의 염색체, 즉 두 벌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세포들에서는 같은 주소가 두 번 사용되는 것이다. 모든 세포는 9번 염색체 2개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9번염색체 속에 들어 있는 7,230번 장소도 2개이다. 그 두 장소에 있는 내용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이것은 다른 개체와 비교할 때도마찬가지다. 46개의 염색체를 가진 세포에서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정자가 만들어질 때, 정자는 같은 주소를 가진 2개의 장소 중 어느 하나만을 갖게 된다. 정자가 그중 어느 것을 가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 난자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정자와 난자의 주소 체계는 같은 종이면 모두 같지만 저장된 내용이라는 면에서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무시해도 좋을극소수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되면 다시 46개의 염색체 모두가 갖추어진다. 그리고 이 46개의 염색체는 발생중에 있는 배의 모든 세포 속에서 복제된다.
ROM은 처음 만들어질 때를 제외하고는 거기에 뭔가를 써넣을 수는 없다고 했다. 복제 중에 가끔 실수가 생길 때를 제외하면 이것은 세포속에 있는 DNA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종 전체의 ROM들로 이루어진 집합적인 정보 은행의 차원에서는 무엇인가를 써넣을 수 있다는 말이틀리지 않는다.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선택적으로 살아남고 번식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발전된 생존 지침이 그종의 유전자 집합에 ‘씌어진다. 진화는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DNA의 각 저장 장소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내용들 중 어떤 것이 득세하는가하는, 유전자의 빈도 변화에서 비롯된다. 말할 것도 없이 모든 내용들은 어느 때건 개체의 몸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집단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대립 유전자들의 빈도 변화이다. DNA의 주소 체계는 그대로 보존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저장 장소에 들어 있는 내용들의 통계적인 수치가 변화하는 것이다. - P203

모든 체세포가 똑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세포들의 형태와 기능이 천차만별인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체세포들이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모양과 행동을 보이는것은 세포마다 다른 유전자들이 ‘읽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유전자들만읽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린다. 가령 간세포는 자기의 DNA ROM에서신장세포를 만드는 데 해당하는 유전자는 읽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마찬가지다. 세포가 어떤 모양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는 세포 속의유전자 중 어떤 것이 읽히고 번역되어 단백질 분자로 만들어지는가에달려 있다. 이것은 다시 세포 안에 이미 존재하는 화합물의 영향을 받는다. 세포 안에 이미 존재하는 화합물이 어떤 것인가는 전에 읽힌 유전자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인접한 세포가 어떤 종류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1개의 세포가 2개로 분열할 때, 2개의 딸세포가 반드시 똑같지는 않다. 가령 수정란 속에서는 특정한 화합물이 골고루 분포하지 않고 세포의 어느 한쪽에 몰려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극화(化)된 세포가 분열하면 딸세포는 위치에 따라 다른 종류의 화합물을 갖게 된다. 이것은 두 딸세포에서 서로 다른 유전자가 읽힐 것임을 의미한다. 그 결과 세포 스스로 분화를 촉진하는 과정이 진행된다. 최종적인 신체의 모양, 팔다리의 길이, 뇌의 기능, 행동 양식 등은 모두 다른 종류의 세포들이 상호 작용하여 나타나는 간접적인 결과이다. 세포들의 차이는 다른 종류의 유전자를 읽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분화 과정은 고도로 복잡한 하나의 기관이 치밀하게 구성된 어떤 위대한 설계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3장에서 살펴본 ‘피드백‘ 방식을 통해 자동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훌륭한 예다. - P207

DNA의 정보가 전달되는 두 가지 경로, 즉 수직적 전달과 수평적 전달 간에는 기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DNA의 정보는 정자나 난자를 만드는 세포의 DNA로 수직적으로 전달된 다음에 다음 세대에게 전달된다. 다음 세대는 또 그 다음 세대에게 전달한다. 이런 식으로 DNA의 정보는 미래에 나타날 세대에게 한없이 전달된다. 이것을 ‘보존용 DNA‘ 라부르겠다. 이 보존용 DNA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보존용 DNA가 전달되는 세포들의 계보를 생식 세포선(germ line)이라 부른다. 생식 세포는 정자와 난자를 만드는 세포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다음 세대의 조상인 셈이다. DNA는 또한 ‘옆으로‘, 즉 수평적으로도 전달된다. 생식 세포가 아닌 세포, 예를 들면 간세포나 피부 세포 따위에 전달되고, 그러한 세포들 속에서 다시 RNA에 전달된다. 그 다음 단백질에전달되고, 그 결과 배의 발생 과정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최종적으로 성체의 형태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수평적전달과 수직적전닿은 3장에서 말한 ‘발생‘이라는 프로그램과 ‘생식‘이라는 프로그램에 각각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 P208

기록 보존용 매체로서 DNA의 기능은 탁월하다. 메시지를 보존하는능력은 돌이나 바위의 불변성을 훨씬 능가한다. 소와 강낭콩은 (그 밖의모든 생물도) 히스톤 H4 유전자라는 거의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것의 내용은 306개의 DNA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히스톤 H4 유전자가모든 종의 염색체에서 같은 주소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종은 염색체의 주소 체계가 달라서 주소를 비교할 수 없기때문이다. 하지만 소의 DNA에 들어 있는 그 306개의 문자열과 강낭콩에 있는 306개의 문자열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소와 강낭콩은그 306개의 문자열 중 단지 2개에서만 차이가 있다. 소와 강낭콩의 공통조상이 정확히 얼마나 오래전에 살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화석증거에 따르면 그 시기가 10억 년 전과 20억 년 전 사이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대략 15억 년 전이라고 가정해 보자. (사람한테는 상상을초월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공통 조상에서 갈라진 이 두 생물은 각자306개의 문자 중에서 305개를 보존했다. (아니면 어느 한쪽이 306개 모두를보존하고 다른 쪽이 304개를 보존했을 수도 있다.) 묘비에 새긴 글자도 수백년 정도만 지나면 닳아 없어져 거의 분간할 수 없게 되는 것과 비교하면엄청난 내구성이라 할 수 있다. - P209

좀 더 깊이 생각하면 뭔가 약간 역설적인 면이 있는 듯하다. 히스톤같이 아주 느리게 진화하는 분자들은 자연선택의 영향을 가장 받기 쉬운 분자들이었다. 피브리노펩티드는 가장 빠르게 진화하는 분자들이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에 거의 완전히 무시당하기 때문이다. 피브리노펩티드는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속도로 자유롭게 진화할 수 있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항상 진화의 원동력으로 자연선택을 강조하기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선택이 없으면 진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 역으로 강력한 ‘선택압‘ 은 진화 속도를 빠르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은 그와 정반대이다. 자연선택은 진화에 브레이크를 거는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자연선택이 없는 상태의 표준 진화 속도가 바로 진화의 최대 속도이며. 그것은 돌연변이 속도의 동의어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역설적이지 않다. 잘 생각해 보면 다른 해답이없음을 알 수 있다. 자연선택를 통한 진화는 돌연변이 속도보다 빠를 수없다. 왜냐하면 돌연변이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변종이 만들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떤 새로운 변종을 수용하고 다른 것을 도태시키는 일이다. 돌연변이 속도는진화가 일어나는 속도가 가질 수 있는 최대 한계선이다. 자연선택은 대개 진화에 관련된 변화를 막는 것과 상관이 있지 그것을 추동하는 것과는 별 관련이 없다. - P213

생물의 놀라운 정보 저장 능력의 핵심에 DNA 분자가 있다는 것을알았다. DNA는 아주 작은 공간에 엄청난 양의 정밀한 디지털 정보를 담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수백만 년 단위의 오랜 기간 동안 보존할 수 있다. (거의 틀리지 않고, 하지만 틀리는 수가 있긴 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DNA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의 본질이라는말이다. 이것은 버드나무 씨앗의 이야기에서 끌어내려고 했던 사실이다. 살아 있는 생물은 다름 아닌 바로 DNA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말이다. 이 사실이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독자가 그 사실을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 DNA 분자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개체의일생과 비교해 볼 때 거의 영원히 보존된다. DNA가 담고 있는 메시지의 수명은 (몇 안 되는 돌연변이를 포함한다면) 몇백만 년에서 몇억 년에이른다. 다시 말해서 개체 수명의 몇만 배에서 몇조 배에 달하는 것이다. 개체는 단지 DNA가 그들의 천문학적인 수명 중 얼마간의 시간 동안만 짧게 거처하는 일시적인 용기에 불과한 것이다. - P215

생명이 없는 행성에서 생명이 생기기 위한 필수 요소는 무엇인가? 그 요소는 지구에서 어느 순간에 생명력으로 변했다. 그것은 숨도, 바람도, 죽은 사람을 살려 내는 어떤 종류의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성질이다.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는 성질이다. 이것이야말로 누적적인 자연선택을 위한 기본적인 요소다. 어쨌거나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리학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는 어떤 존재, 또는 내가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 복제자(複製子)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생물에서 그 역할은 거의 전적으로 DNA 분자가 맡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성질을 가진 것이면 어떤 물질도 가능하다. 원시 지구에 출현한 최초의 복제자가DNA는 아니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세포 속에서만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다른 분자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유지될 수 없는 DNA 분자가 저절로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최초의 복제자는 아마 DNA보다 더박하고 단순했을 것이다. - P218

생명의 기원에 관한 이론들은 생명이 탄생하는 데에 얼마간의 행운이 따랐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행운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의문점은 얼마만큼의 행운이 필요했나 하는 것이다. 지질학적 시간의 유구함은 법률이 우연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우연의 일치를 상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생명에 관한 현대의 이론에서 핵심은 누적적인 자연선택이다. 그 이론들은일어날 수 있는 일련의 운 좋은 사건들(무작위적인 돌연변이)과 자연선택과정을 결합한다. 그래서 그 과정이 끝나갈 때쯤 완성된 최종 산물은 한번의 행운으로 생겨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심지어 우주의 나이보다 100만 배나 긴 시간이 주어져도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엄청난 행운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문제를 푸는 열쇠다. 하지만 그것도 일단은 어떤 작용을 통해 시작되어야 한다. 따라서 누적적인 자연선택의 기원 그 자체에서도 일회의 우연으로 발생한 사건을 생각해야만 한다. - P234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창조주는 아마 매일매일 일어나는진화 과정을 통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창조주가 호랑이나 염소를 설계하거나 나무를 만들지는 않지만 태초의 복제 기구와 복제자, 즉 DNA와 단백질을 만들어 놓았고, 그 결과 누적적인 자연선택이 일어나 모든 진화 과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자가당착에 빠지는, 근거가 박약한 주장이다. 생물이 가진 복잡성을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일단 어떤 복잡한 것을전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즉 그 복잡한 DNA • 단백질 복제 기구를 전제한다면 그것이 더 복잡한 생물을 만드는 과정을 상상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DNA • 단백질 복제 기구와 같은 복잡한 것을 설계할 수 있는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도 최소한 그 복제 기구만큼이나 복잡할 것이다. 하물며 그가 기도를 들어주고 죄를 벌하는 따위의 고도의 기능까지 추가로 가진다면 그는 훨씬 더 복잡한 존재일 것이다. 초자연적인 설계자로 DNA • 단백질 복제 기구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은 엄밀히 밝히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설계자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은 원래부터 있었다.‘ 따위의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런 나태한 방식을 버리고자 한다면 단지 ‘DNA가 원래부터 있었다.‘ 또는 ‘생명은 원래부터 있었다.‘ 라고 말하면 된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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