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잠시 멈춰 이슬람교와 초기 기독교를 비교해보자. 이 둘 사이에서는 많은 유사점들이 있다. 이주에 있어서는 특히 더 그랬다. 물론 이슬람은 최초의 지상 제국을 건설하는 데 기독교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두 종교 모두 신학 체계와 실천에 있어서 이동성이 아주 높아, 거의 이주성 종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초기에 성지나 창시자들이 중요하긴 했지만 그래도 두 종교 모두 특정영토나 민족 집단에 얽매이지 않았다. 또한 유대교나 힌두교와 달리특정 공동체나 장소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두 종교의 창시자들이 원거리 이주민은 아니었지만, 소소한 이주 이야기들이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예수는 이동 중에 말구유에 태어나 베들레헴에서는 집 없는 이주민이었고 이집트에서는 난민이었다. 무함마드는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주했다. 그리고 양쪽 모두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여기저기 옮겨다닐 것을 권장했다.
이 두 종교의 성장은 불신자들을 개종시키려는 열망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는 그 신도들이 창시자들이 태어나고 죽은 거룩한 성지를 떠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유랑해야 함을 의미했다.  - P157

안달루시아에서는 믿기 어렵겠지만, 서반구에서 가장 위대한 이주민이자 탐험가였던 전형적인 북유럽인들도 소수 볼 수 있었다. 스페인 남부에는 우리가 바이킹이라고 알고 있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기 844년에 세비야를 습격했지만 결국 안달루시아인들에게 패했다. 많은 바이킹들이죽었고, 일부는 포로로 잡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개종한 바이킹들은 세비야 외곽에 정착할 수 있었고 치즈 제조업자로 일했다고 한다.
바이킹에 대한 여러 고정관념이 있겠지만 그중 어느 것도 남부스페인의 무슬림 치즈 제조업자를 떠오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이킹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이동하는 북유럽인, 특히 배를 타고 먼거리를 여행하는 스칸디나비아인을 떠올리지만, 보통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극도로 부정적인 것부터 요란스럽게 긍정적인 것까지 극과 극을 달린다. 어찌되었든 바이킹에 대한 고정관념은 대개 바이킹 이주의 규모와 범위를 폄하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 P160

최근 수십 년 동안 영어권 역사가들도 바이킹에 대한 기록을 바로잡아왔는데, 특히 바이킹 시대의 복잡한 이야기들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바이킹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일부 바이킹 이주민들이 유럽 지배 계층 엘리트에 동화되는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바이킹의 약탈, 무역 및 이주가 지리적으로 놀라운 규모였다는 내용이었다. 바이킹들은 바다와 강을 통해고향에서 2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까지 세 방향으로 이동했다.
북서쪽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캐나다 연안까지 갔으며, 남서쪽으로는 영국, 프랑스, 지중해까지 그리고 남동쪽으로는 러시아를 통해 흑해와 콘스탄티노플까지 갔다.
바이킹이 이렇게 이동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나 고국의 인구과잉이 한 가지 중요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뛰어난 조선과 항해 기술을 갖추고 있어 동시대 사람들보다 더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다른 요인들이 있었는데,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하면 부와 권력 그리고 토지와 지위를 얻을 수 있고, 폭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와 깊은 호기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뒤섞여 세 방향으로 전개된 대대적인 바이킹 이주의 동기와 이주민들의 삶의 선택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많은 고고학 및 유전학적 증거가 남아 있어 바이킹에 대한 이해에 필요한 세부사항을 제공해주고 있지만, 많은 이주민들이 그랬듯이 정작 바이킹 본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 P161

아이슬란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주 이야기에서 예외인 경우였다. 한동안 그곳은 지구상에서 영주하는 원주민이 없는 마지막 주요 대륙 중 하나였으며, 870년대에 시작된 첫 정착 이후에도 대규모이주민 유입은 없었다. 약 100년 후 바이킹이 이주해 들어왔지만 그들이 경작할 만한 농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아이슬란드는 고립된위치와 낮은 이민율로 인해 유럽에서는 드물게 높은 수준의 유전적•문화적 연속성이 유지되었다. - P166

어떤 면에서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족보망은 의미가 거의 없으며 바이킹 유전자의 확산도 일시적인 흥미거리일 뿐이다. 우리가 야로슬라프, 보에몽, 정복왕 윌리엄, 영국의 해롤드를 정말 바이킹이었다고 생각하는지, 그들의 DNA 중 몇 퍼센트가 스칸디나비아 혈통인지는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두 가지 중요한 이주 이야기는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첫째, 바이킹과 그 후손은 이른바 중세 귀족의 중심부가 되어, 여왕이 외국인인 경우는 흔한 일이었고, 왕이 외국인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기회는 동유럽의 기독교 국가 국경 지역이나,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에 있었다. 따라서 십자군 원정은 특히 둘째 아들이나 사생아들에게 큰 기회였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 성지에서 무슬림들을 몰아내는 것이 사명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던것 같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한 이들의 사명은 곧 추악한 토지 수탈로 바뀌곤 했다. 그 당시 서유럽인들이 통치하는 십자군 왕국이 여러 개 수립되었으며, 그들은 서로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둘째, 이 이주 이야기는 바이킹에 관한 것이지만, 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중심에는 미개하고 잔인한 야만인으로 묘사되는 북쪽의 이교도 집단이 있다. 이들은 기독교 중심의유럽에서 경멸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유럽 엘리트층에 편입되면서 귀족의 일원이 되었다. 바이킹과 그 후손들의 군사적 능력이 성공의 주요한 이유였지만, 현지와 적극적으로 동화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현지와의 동화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면서 스칸디나비아 이름과 언어, 관습 등 거의 모든 것을 포기했으며, 오딘과 토르 등자신들의 신들도 내려놓았다.
하지만 바이킹들은 그들의 역사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주했던 과거를 자랑스러워했고, 고대 북부 이교도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궁정 역사에 남겨놓았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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