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정착시키고 인구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또 반대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주시키라. 그리고 가장 큰 대륙을 통혼과 친족 관계를 통해 화합과 우의로 이끌라

알렉산더는 아주 거대한 대륙 규모의 사회적 통합을 꿈꾸었던것 같다. 그는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또 제국의 다른 민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다른 대륙의 사람들 간의 대대적인 양방향 국가 주도 이주와 통혼을 제안했다. 또한 아시아인과 유럽인이 동등하며, 이주와 혼인을 통해 양측의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친 갈등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 군인들이 새로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에 정착할 수있도록 장려했고, 그들이 현지 여성들과 결혼하게 함으로써 그는 그 과정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그쳤고, 양방향이 아닌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한 방향의 이주일 뿐이었다. 그가자신의 계획들을 어떻게 진행할 생각이었는지, 여성의 이주도 계획했는지, 그리스 도시국가에도 페르시아인들을 정착시킬 예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후계자들은 세상을 바꾸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이 그리스 혈통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자랑스러워했으며, 그의 이념을 실행할 의도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거대한 이주 계획은 그와 함께 사라졌다. - P96

18세기 들어 여러 학자들이 산스크리트어와 서양의 고전 언어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언어들이 단일 어원에서 유래했으며, 인도 북부, 이란 및 유럽 대부분의 언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상상의고대 민족이 탄생했다. 그들은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통과해 이주했으며, 그들의 유산은 서쪽의 아이슬란드어에서 동쪽의 벵골어에 이르기까지 서로 관련된 매우 광범위한 현대 언어로 이어졌다. 그러나인도-유럽인이 정확히 어느 지역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모르고, 그들의 대규모 이주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도 없었으며, 대규모 인구 이동으로 언어가 확산됐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일부 유럽 학자들은 자신들이 답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아리아인에 대해 언급한 고대 자료에서 몇 가지 단서를 발견했는데,
그들은 매우 허술한 서면 증거를 바탕으로 초기 산스크리트어 문헌중 리그베다 Rigveda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브라만교 경전- 역자 주)에 나오는 아리아인들은 서쪽에서 온 이주민이거나 침략자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에 따라 아리아인의 조국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지역들이제시됐는데, 그곳에는 독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주장들은 훨씬 더허술하고 인종차별로 가득 차 있었지만 여러 나라의 많은 학자들이아리아인이 원래는 금발에 파란 눈과 하얀 피부를 가진 독일인이고,
그들이 북유럽에 있는 조국을 떠나 멀리 이주하여 통혼함에 따라 신체적 특성들이 희석됐다는 개념을 수용했다.
영국 태생으로 독일에 살고 있던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이라는 작가가 1920년대에 이러한 개념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에 알려준 핵심 인물이었다. 오래지 않아 나치는 독일인이 원조 아리아인이며 지배 인종이라는 이념을 채택했다. 그들은 심지어 고대 인도의 스와스티카 swastika 문양을 당의 상징으로 차용했다. 히틀러가 패배한 이후로 서방에서는 신나치 집단을 제외하고는 아리안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인도 이외 지역에서는 스와스티카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 P101

인도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알지도 못하는고대 이주에 대한 논쟁이 그 정도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카스트 제도, 성별, 언어, 종교, 피부색 그리고 이주 같은 현대 인도의 정체성을 놓고 벌이는 투쟁의 일부다. 그 정체성에 대해 깊은 의견 충돌이 있으며, 이 문제 하나 하나에 깊은 분열이 담겨 있다. 아리안 논쟁은 그 모든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렇게 빈약한 한 단락이 아니라 별도의 책으로 다뤄져야 할 정도로 광범위한 주제다. 그러나 인도의 권력이 대체로 아직도 피부가 더 희고, 카스트 계급이 높고,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북부 남자들의 손에 놓여 있다는 점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유전학자들의 증거와 주장을 믿는다면 그들은 약 4천 년 전에 인도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도-유럽어 사용자의 기원을 찾는 데 있어서 해결해야 할 더광범위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 대초원이든 다른 곳이든 조상의 모국이 존재한다는 개념 그 자체다. 우리에게 그런 근원이 있다는 전제하에 모든 논쟁이 이루어졌지만, 사실은 그 반대가 진실에 더 가깝다. DNA, 고고학, 언어 분석 또는 문화적 전통 등을 통해 우리의 근원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 지역들은 기껏해야 고대 조•상들이 통과한, 깊은 역사 속의 임시 거주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 P106

그리고 그들이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파시족이 배를 타고 구자라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서로 언어가 달라 그곳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지역의왕은 자신의 영토에는 이주민을 받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정중하게 표현하기 위해 찰랑찰랑할 정도로 가득 찬 우유 항아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이주민들의 지도자였던 조로아스터교 사제는 그 항아리에 설탕 한 숟가락을 넣었고 우유는 넘쳐흐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달고 맛이 좋아졌다. 그의 지혜 덕분에 파시족은 구자라트에 머물도록 허락을 받았다. - P109

로마는 로마 공화국을 종식시키고 제국으로 탄생했다. 이때쯤 ‘로마‘라는 단어에 문제가 생겼다. 물론 로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를 의미한다. 그러나 로마가 오지 너머까지 정복하여 세력이 커지면서 로마는 도시 이상을 의미하게 되었다. 로마는 더 이상 일개 도시가 아니라 제국의 수도, 문명의 본보기, 군사적·종교적 권세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고 로마는 이제 한 도시가 아니라 그들에게 정복당한 모든도시 국가를 통합하는 이름이 되었다. 비록 그들 대부분이 온전한 시민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국경 안에 사는 모든 이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인이었다.
로마라는 개념은 점점 더 성장하여 도시로서의 로마 없이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로마가 바퀴라도 달린 것처럼 스스로 로마인이라고 선언한 사람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굴러가 정복할수 있는 것 같았다. 오비디우스 시대에 이르러 로마는 북해에서 사하라까지, 대서양에서 흑해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 시에 한 발짝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시민‘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시민권을 샀을 수도 일을 통해 얻었을 수도, 또는 새로운 식민지에 정착한 군인일 수도 아니면 그냥 로마 시민의 자녀일 수도 있었다. - P121

야만인 barbarian이란 개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복잡한 개념이다.
그것은 광범위한 다른 용어 집단을 파생시킨다. 대부분은 ‘야만스러운‘, ‘야만성‘과 같이 경멸감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지만 때로는 베르베르족 Berbers, 바르바리 해안 Barbary Coast처럼 그냥 서술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는 로마인들의 변화하는 세계관, 좀 더 구체적으로 로마인들이 국경 근처에 사는 외부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이다. 원래 ‘야만인‘은 그리스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를 묘사하는 의성어였으며, 헤로도토스 같은 초기 그리스 작가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 가치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중립적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후기 그리스에서는 이 말이 야만성과 어리석음을 함축하는 부정적인 용어가되었고, 주로 라틴어에서 그랬다. 하지만 ‘로마인‘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제국 성장에 따라 달라진 것처럼 ‘야만인‘의 의미도 달라졌다. 그리고 ‘야만인‘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경우 ‘로마인‘의 반대말이되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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