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수직적 계층화는 계약자유의 원칙과 상충하지 않으며, 경제성장속도가 빠른 나라일수록 부의 수직적 계층화에 관대하다는이언 모리스의 관점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인종•신분•종교 등 거대 범주에서의 계층화는 대부분 (현실에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론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되어가고 있다. 이는 효율성이라는 견고한 가치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저항하면서, 또는 이원론이라는 손쉬운 분류법에 대항하면서 인류가 얻어낸 것이다. 법 또한 이런 흐름을 반영하여 변화해왔다. 가부장 질서를 토대로 하는 성별에 따른 차별 문제도 여전히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수직적 계층화가 약화되어감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특정 사회에 지배적인 규범들이 무엇이냐‘가 판결에 영향을 미칠수밖에 없다. 우리 대법원의 판결들이 가부장 질서 내에 안주하고 있는 편이라 해도 변화의 움직임 또한 감지되고 있다고 인색하게나마 긍정해보고 싶다. - P32

연방대법원에서도 교직원들이 알몸 수색을 한 행위가 헌법에 합치하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했다. 법정에서 남성 대법관들은 이 사건에서 무엇이 잘못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질문을 쏟아냈다. 진보 성향의 대법관으로 분류되는 스티븐 브라이어 Stephen G. Breyer 대법관조차도 "속옷을 벗는 것이 어째서 이토록 중요한 문제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아이들은 체육시간마다 옷을갈아입지 않던가요? 제가 여덟 살, 열 살, 아니 열두 살 때였는지는몰라도, 하루에 한 번 옷을 갈아입던 기억이 납니다. 체육시간에 나가서 뛰어놀려고 말입니다. 아닌가요? 저 역시 그렇게 옷을 갈아입었고 친구들이 제 속옷에 뭔가를 집어넣는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해서 법정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당시 유일한 여성 대법관이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Ruth Bader Ginsburg가 듣다 못해 받아쳤다고 한다. "그 속옷을 남이 벗겼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브래지어까지 벗어서 흔들어보라는 요구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후 긴즈버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그들은 열세 살 소녀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 또래 여자아이들이 얼마나 민감한지 전혀 모른다는 거죠"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대법원은 소수의견 없이 학교가 레딩을 알몸 수색한 것은 헌법에 위반되는 행위라는 판결을 내렸다. - P38

보편성을 기본적인 원리로 하는 법의 해석에서도 그 보편성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는 개별적 인간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는 감수성은 늘 필요하다. 누스바움 식으로 말하자면 ‘비대칭성에 대한 감수성‘이다. 미국 대법관의 청문회 석상에서 『제인 에어」가 언급되는 이유도 이 점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지배적인 성적 고정관념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을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라면 그때의 감수성은 피해자 감수성일 뿐 여성인 피해자의 감성을 가리키는말은 아닐 것이다. - P48

헌법재판소의 결정이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공익성을 이유로 조직 내부에 폭넓게 관여하면서, 교원과 공무원의 정치적 자유에 대해서는 그 구성원이 특수하다는 이유로 규제가 정당하다고한 것이었다. 결국 조직과 구성원을 모두 규제하는 것이어서 조직자체의 자율성이나 민주적 원칙이 발휘될 여지가 제한됨은 물론구성원의 기본권 침해도 문제된다. 조직의 민주적 운영을 보장하고 구성원의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하여 조직과 구성원이 모두 민주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처음부터 봉쇄되어 제대로 검토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P72

가습기살균제와 같은 위험한 생활용품 등은 경우가 좀더 심각하다. 시판하기 전에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실험을 미리 거치는것보다 문제가 된 이후에 배상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면제조업체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생명이 달린 문제가 된다.
효율적 계약파기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계약이 이행되는 것과 이행되지 않는 것은 효용성의 관점에서 따져볼 문제일 뿐 도덕적인 비난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쉬피오는 "저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경우에만 약속을 지키는 세상이라면 말이라는 건 이제 아무런가치도 지니지 못할 것"이고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 가장 높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며 이에 따라 약자들은 정치가의 말을 조금도 신뢰하지 못하고, 법률에도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않는다"라고 한다. 법의 제도적 기능은 "각자의 행위가 상식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기준"으로서의 역할인데, 효용성이 기준이 된다면 결국 힘의 원칙만이 가치를 가질 것이다. - P84

특히 초국적 대기업은 국가의 제도적 틀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권력기법을 고안해내고 완성해가며, 대형 미디어시장을 장악하여 이미지와 사고의 세계에 대한 통제권도 거머쥐었다. 계약관계의 재봉건화는 새로운 형태의 충성서약 관계를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자유가 계약의 목적에 봉건적 구조로 예속되어있는 셈이다. " 그는 "수치로 잴 수 있는 가치의 협상을 넘어서는 모든 부분을법이 맡아줄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라고 말한다. "법이 분명히 해주어야 할 부분을 계약으로 하여금 정의하게 내버려두면 계약 당사자들은 재산상의 단순한 이해관계를넘어서는 목적들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또한 계약은 "스스로 공공선을 정의하는 데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공적인 것‘이 된다"라고 한다. 
노동3권을 헌법에서 보장하고 근로기준법의 많은 부분을 강행규정으로 정한 우리 법제도하에서도 근로자 측의 노동관련법상의권리는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강행규정인 임금관련 규정을 임금협상에서 수정해버릴 수도 있는가 하면 아무런 적극적인행위를 않는 채무불이행의 형태인 단순 파업조차도 업무방해죄로 형사처벌과 손해배상의 대상이 되는 위법행위가 될 수도 있다고하기 때문이다. 이런 판결들의 근저에 기업 측의 입장에서 해석된계약우선주의나 효용성의 관점이 놓여 있다는 점은 부인되기 어렵다. 게다가 쉬피오의 우려처럼 그러한 계약 자체가 스스로 공공선을 정의하기까지 해버린다면 헌법 원칙마저도 뿌리째 흔들릴 수있을 것이다. 종국에는 힘의 원리만이 가치를 가지는, 우리가 간신히 건너온 전시대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는 기우에 불과한가.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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