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이미 현실이 된 세계

형님, 일전에 읽은 예언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c.1606)

어두운 밤, 퍼붓는 빗속에 텐트를 쳤다. 갑자기 불어난 물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 높이 올라왔기를 작동 중인 세탁기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폴대가 세차게 흔들리는 텐트에 몸을 구겨 넣었다. 거센 바람이 텐트의 젖은 입구를 후려치며 얼굴에 물보라를 뿌려댔다. 폭풍은 밤늦도록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서히 젖어드는 침낭에 누워있다 보니 괜한 짓을 했다 싶어 후회막급이었다. - P12

복잡한 개념이라도 서사가 덧입혀지는 순간 공감대가 형성된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중심으로 철학적 담론의 틀을 짜고, 칼 세이건이 상상 속 우주선의 빛나는 갑판에서 천체물리학을 가르친 데는 이유가 있다. 이야기는 객관적 사실만으로는 건들 수 없는 뇌의 구역에 파고들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는 방식을 바꾸는 화학물질의 분비를 자극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학습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기후변화를 이해하고 반응하는 방식은 결국 이야기로 전달하고 이야기로 듣는 것에 달려 있다. 연구자로 살아가는 동안 처음에는 무관심에 가까웠던 기후변화에 대한 내 태도도 이야기를 통해 완벽하게 달라졌다. 그러나 내 마음가짐을 바꾼 이야기는신문의 머리기사나 치열한 정책 논쟁에 있지 않았다. 내가 연구하는 동물과 식물의 삶에서 실제로 벌어진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나를 바꿔놓았다. - P16

 지난 30년간 우리 인간이 대처의 필요성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사이에 지구의 다른 종들은 이미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런 자연의 대응을 살펴보면, 아무리 복잡하고 해석이 달라도 결국 미래 기후 시나리오의 결과는 변화에 직면한 개별 동물과 식물의 반응과 행동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어떤 환경에서든 개의치 않고 살 수 있다면 날씨가 달라지는 것쯤은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필요조건은 결코 일반화할 수 없다. 세상에 다양한 생물이 존재하는것도 모두 세분화한 환경조건 때문이다. 지구상의 수백만 좋은 각자자기가 사는 곳의 특수한 생태적 상황에 적응해 변해왔다. 환경이 달라지면 대응이 불가피하고, 변화의 속도가 걷잡을 수 없어지면 결국 생태계 전체의 틀이 통째로 새로 짜이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현재의 기후변화가 심각한 위기로 여겨지는 가장 큰 이유가 속도인 것도 그래서다.  - P17

1971년 두 명의 새내기 고생물학자가 미국지질학회 연례 회의에 ‘단속평형설斷續平衡說‘이란 이론을 들고나왔다. 대학원 시절부터 친구이자 공동 연구자였던 나일스 엘드리지와 스티븐 제이 굴드는 오랫동안 고생물학 분야의 골칫거리였던 한 질문에 새로운 답을 제시했다. "잃어버린 고리는 어디에 있는가?" 만약 진화가 정말로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이라면 한 형태가 다른 형태로 바뀌는 전이 과정이 화석 기록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화석 속 종들은 수백, 수천만년 전 지층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별다른 변화 없이 지속되는 경향이 있었다. 다윈도 이 문제를 아주 잘 인지했던 터라 "내 이론을반박할 가장 명백하고 심각한 이의 제기"라고 불렀고, 《종의 기원》에서 ‘지질학적 기록의 불완전함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9장을통째로 할애할 만큼 신경 썼다. 암석이란 특정한 조건에서만 생성되고 게다가 극히 일부 암석에만 화석이 남아 있으므로, 대부분의 종과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은 기록되지 않고 사라진다. 다윈은 "자연이 남긴 지질 기록은 세계 역사의 불완전한 보존이다. ••• 곳곳에 짧은 장만 남아 있고, 그마저도 몇 줄씩 흩어져 있는게 고작이다"라는 훌륭한 비유를 남겼다. 엘드리지와 굴드도 지질기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들은 중간단계의 화석이 귀한 다른 이유를 제시했다. 바로 빠른 진화다. 만일새로운 종이 긴 시간 동안 천천히 발생하지 않고 (지질학적 관점에서)하루아침에 생성되었다면, 그 변신 과정은 흔적을 남길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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