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열려 있는 사람이라 변화에도 적극적인거겠지. 나, 너 처음 봤을 때부터 확 느꼈는데. 열려 있는 사람이란거. 튼튼하게 활짝 열리는 창문이나 공기가 잘 통하는 집처럼." - P204

많이 준비해가봐야 클라이언트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른다. 그 점이 우윤의 직업을 존재하게 해주지만 난항은 항상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뭘 원하는지 모르는 상대에게 이건가요? 아니면 이거는요? 수십 번, 수백 번을 제시해야 하니까.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서 버려진 괴물들의 폴더만 자꾸 커질 것이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아는 클라이언트야말로 A급인 것인데, 기예르모 델 토로가 아닌 이상 잘 없다. 2019년의 <헬보이>를 보고 어찌나 실망했던지. 델 토로가 다 만들어둔 것들을 그렇게까지 망칠수 있다니····델 토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그 많은 돈을 들여 굳이 증명할 것은 없었다. 우윤의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에이브가 나오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었다. 문화산업의 모든 것은 한끗차이로 결정되는데, 그 한끗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도무지 짐작이가지 않았다. 한끗이 분명 있었던 것 같은 사람들도 어느새 지루하고 뻔한 걸 만들기도 하니, 한끗이란 것은 의외로 분실하기 쉽거나 유효기간이 있는 무엇에 가까운지도 몰랐다. 그 한곳이 자신의 안쪽에 있었으면 했다. 힘을 잃지 않았으면 했다. 서브컬처계는 기분 나쁘게 뒤틀린 부분이 분명히 있어 괴물들의 마스터는 지금까지 늘 남자들이었는데, 괴물을 잘 만드는 여자가 여기 있다고외치고 싶었다. 명예욕인가? 허영심인가? 하지만 문화산업은 어차피 명예욕과 허영심으로 굴러가는 게 아닌가? - P247

특히 1983년 야학연합회가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 한다며 조작해가지고는 수백 명을 잡아들이던 때, 그 집에 자주 왔어요. 야학 좀 하고 노조 좀 한다고 사람을 잡아다 고문까지 시키다니, 말도 안 되는 날들이었어요. 나는 속으로 노동 야학이라는게 구한말에도 있었고 일제 때도 있었는데 정부가 눈이 뒤집힐 게뭐 있나 싶었거든요. 1987년을 맞고서야 아. 그게 정말 힘있는 운동이어서 탄압을 받은 거였구나 깨달았지요. 어떤 시대는 지나고난 다음에야 똑바로 보이는 듯합니다. - P256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 P288

"괜찮은 녀석이 오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앤디가 보드를 힘껏 밀어주었다. 앤디의 말을곧이곧대로 믿고 힘을 낸 것은 아니었다. 전보다 빠르고 큰 파도, 흩어지지 않는 파도였고 우윤은 느낄 수 있었다. 이건 탈 수 있어. 이 파도는 탈 수 있어. 보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맨땅 같았다. 우윤은 쉽게 무릎을 세우고 몸을 일으켰다. 부드러운, 분절 없는 동작이었다. 보드는 계속 나아갔고 우윤은 그 위에서 한 번도느껴보지 못한 쾌감을 느꼈다. 달리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것도아니었다. 단순히 미끄러지는 것과도 달랐다. 보드 밑에 느껴지는 힘은 우윤이 만나보지 못한 거대한 동물의 일부 같았다. 바다의힘, 지구의 힘, 모험과 죽음의 힘. 우윤은 계속 계속 나아갔다. 환호하며, 웃으며, 자부심을 느끼며, 백 미터를 나아갔는지 백오십미터를 나아갔는지 잴 수는 없었지만 그보다 길게 느껴졌다. - P290

"상헌씨랑은 할머니가 인용한 글을 나도 인용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여전히 그러고 싶어?" - P304

난정은 시선이 죽기 전 해에 무슨 예감이 있었는지 원하는 책을 전부 가져가라고 해서 손수레를 끌고 매주 부암동 집에 들렀던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말았다. 차를 끌고 갔으면 한두 번이면 되었을 것을, 매번 혼자 손수레를 끌고 갔었다. 열 번 남짓의 방문을시선이 얼마나 반겼었는지, 진심을 알아봐줬었는지 이야기하고싶은 마음과 그것을 죽고 없는 사람과 둘만의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싸우다가 후자가 이겼다. 너무 어렸기에 별 기억이 없는 해림이 소외감을 느끼며 앉아 있지는 않은지 신경쓰였고, 한사람쯤은 말없이 있는 것도 좋을 듯했다. 하여간 시선의 식구들은 말이 너무 많았다. - P320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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