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병합은 아주 크게 보도됐어요. 이제 전 독일민족이 힘껏 일어서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어요. 방송국 사람들은 아주 멋지게 보도했죠. 그런 건 항상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어요. 무엇이 문제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덮어놓고 열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용해서 말이에요. 당시사람들은 나처럼 모두 어리석었어요.
강제 수용소가 만들어졌을 때, 그러니까 처음으로 <강제수용소>라는 말이 나왔을 때도 그랬어요. 정부에 반대하거나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만 그리로 간다고 했어요. 그래서우린 그런 인간들을 바로 감옥에 가두지 않고 강제 수용소에 보내 재교육하는 걸로 믿었어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당시 방송국에 <율레 야에니슈>라고아주 괜찮은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최초의 아나운서로서아침 점심 저녁으로 뉴스를 진행했는데, 그 사람을 빼고는방송국의 발전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죠. 어쨌든 그런 사람이 갑자기 강제 수용소에 갔다는 거예요."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어요. 「응? 그 사람이 왜?」 「호모래.」 「맙소사, 호모라니. 당시에 호모는...... 정말 다들 몸서리를 쳤어요. 사람 취급을 안 했죠. 그런데 율레 야에니슈가 호모라니. 그렇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 호모라니. 정말 충격이었죠. 친절하면 뭐해? 호모인데.」 그때 이미 우리는 생각이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어요. - P80

정권에 저항한 사건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경우는 없었어요. 백장미단 사건도 그랬어요. 최소한의 내용으로 제한되었죠. 당시 그 사건이 일어났던 뮌헨에서는 그게 어떤 식으로 보도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무척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젊은 사람들이었거든요. 그것도 아직 대학생이었죠. 그런 젊은이들을 즉시 처형해 버린 건 너무 가혹했어요. 누구도 그걸 원치 않았어요.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 사람들도 어리석었죠. 어떻게 그런 일을 계획할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냥 입을 다물고 살았다면 지금도 살아 있지 않겠어요? 그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그랬어요.
무시무시한 시대였어요. 당시엔 그런 문제로 이야기할수 있는 믿을 만한 친구가 몇 되지 않았어요. 더구나 그런이야기를 하더라도 무척 조심해야 했어요. 그러다 마지막에는 늘 이렇게 끝났죠. 우리가 뭘해야하지? 할 수 있는일이 뭐가 있지? 게다가 이런 생각을 깊이 할 만한 시간도없었어요. 그 사건으로 인해 이제 어떤일이 벌어질지 생각하기도 전에 당사자들이 벌써 처형당했으니까요. 한낱 종이 쪼가리 때문에요. 삐라 말이에요. 당시 그 판결은 너무잔혹했어요. 지금은 난 그 사람들이 대단했다고 생각해요. 좀 더 나은 쪽이 결국 승리를 거둘 거라고 단순히 믿은 사람들이죠. 그러기 위해선 뭔가를 했어야 했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예요.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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