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오랜만에 존댓말로 말하는 큰언니를 보며 경아가 회사에서 쓰는 말투, 하고 반가워했다.
"어려운데."
"하지만 승부욕이 생겨"
"제사에 승부욕이 생겨서 어쩔 거야?"
이색적인 제사 계획에 가벼운 술렁임이 일었다.
"엄마가 젊었던 시절 이 섬을 걸었으니까, 우리도 걸어다니면서 엄마 생각을 합시다. 엄마가 좋아했을 것 같은 가장 멋진 기억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상품이 있어요?"
"아니, 그래도 제사니까 상품은 좀 그렇고 박수를 쳐줄 거야"
"에이."
말은 그렇게 해도 설레고 기대에 찬 걸 숨기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참, 훌라는 내가 배울 거야. 예약도 해놨어. 피해서 다른 거해."
명혜가 선언했다. 언제나 조금 강직한 느낌을 주는 명혜가 훌라를 추는 모습을 상상해보고 몇몇이 웃었지만 웃음을 들키진 않았다. - P83

어쨌든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평생 공격성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공격성이 발현되든 말든 살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기분좋게 취했던 이가 돌변하기 직전의 순간을알았고, 발을 밟힌 이가 미처 내뱉지 못한 욕설을 들었고, 겸손을가장한 복수심을 감지했다.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선, 어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첫번째 남편도 두번째 남편도 친구들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 P125

나는 못 갈지도 몰라, 어린 우윤은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지만 지수는 알았다.
"내년에 너 다 나으면 가기로 했어. 방학에 가도 되고, 학교 때먹고 가도 된대. 할머니가 그건 알아서 해주겠다."
"할머니가?"
지수는 매주 찾아와, 학교 친구에게서 얻었다는 꼬질꼬질한 펌플릿을 보물지도처럼 펼쳐 보이며 어떤 놀이기구를 먼저 탈지 상의했다. 첫날부터 셋째 날까지 몇시부터 줄을 서고, 무엇으로 점심을 먹은 다음에, 기념품은 뭘 사고, 퍼레이드와 불꽃놀이는 어디서 볼 건지에 대해 하루에 몰아 풀지 않고 주마다 하나씩 풀었다. 그렇게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한 행동은 그 이후 지수의 삶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으니 예외적인 노력이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야 태연히 즐거워 보이던 지수가 사실은 공들여 본인의 성격답지 않은 일을 해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린 우윤은 지수를 기다리며 고통을 잊었고, 둘이서 써나간 계획 노트는 지수가 없을때도 우윤을 머물게 했다. 놓고 싶을 때도 놓지 않을 수 있게 해주었다.
막상 두 사람이 디즈니월드에 정말로 가게 되었을 때는 플로리다의 어마어마한 더위와 ‘칭크‘라고 욕하며 어린이의 발 옆에 침을 뱉는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세 시간은 기본인 길고 긴 줄 때문에 계획이고 뭐고 눈에 띄지 않는 그늘에서 청포도와 멜론을 먹으며 버티는 게 다였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아팠던 우윤은 물론이고 내내 체력장 일급이었던 지수마저도 눈에 초점이 없다. 그럼에도 행복했다. 소원했던 것이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더 나이들며 그것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인 걸 알게 되었고 말이다. - P1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