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한마디로 원장님과 섬사람들의 길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장님이 아무리 섬사람들을 생각하고 섬을 위해 노고를 바치고 계셨다 해도 원장님은 결국 그 섬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사실 수는 없었기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원장님께서 꾸미고자 하신 섬사람들의 나가 원장님과 섬사람들의 공동의 천국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장님은 저들의 천국이라 하고 저들은 원장님의 천국이라 말하게 되겠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 그 거리가 얼마나 깊고 멀다는걸 전 섬을 나온 후로부터 더욱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전 섬을나온 이후부터 이것저것 참 여러 가지 일을 해봤습니다. 일을 통해 육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속으로 자신을 섞여들어보려구요. 하지만 섞일 수가 없었습니다. 섬 생각이 사라지게 하질 않았어요. 육지 사람들이 절 그렇게 만들었고, 저 자신이 저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흔적 없이 섞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억지로 섞여들면 숨는 꼴이 되었구요. 초인적인 인내와 용기가 없는 한 운명을 같이하기란 그토록 힘이 드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전 저 자신에게서나마 숨어산다는 생각이 가실 때까지 이 육지를 견뎌보려고 오늘까지 이 안간힘을 써가며 버티고 있는 꼴입니다. - P379

여기 너희 천국이 마련되어 있는데 원장님께서는 이미 섬을 빠져나가려는 원생들을 이 섬과 동환에 대한 배신자로 낙인찍고 계십니다.
문둥이들만을 위한 천국- 여기에 또한 원장님의 그 눈에 보이지않는 또 다른 모습의 철조망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불행한 병을 앓는다 하더라도 저들에게도 온갖 인간적인 소땅과 자기 생의 실현욕은 근본적으로 여느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을것입니다. 기구한 생의 역정을 걸어온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저들이 기구해온 천국이 여느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수는 없습니다. 저들이 비록 그것을 망각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저들에게 그것을 다시 찾아주어야 합니다.
원장님께서는 그러나 저들에게 그냥 인간의 천국을 지어주시려는것이 아니라, 문둥이의 천국을 지으려 하고 계십니다. 원장님의 천국계획은 처음부터 이 나라의 나환자를 한데 모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섬 원생들이 섬을 떠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섬안에 낙토를 꾸미시겠다는 원장님의 계획은 섬을 나가기만 하면 육지사람들의 무서운 복수를 면할 수 없으리라는 협박으로 원생들의 발목을 섬 안에 붙들어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방법이 다를 뿐 효과에 있어서는 목적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저들을 그냥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특수한 조건과 양보 위에 그것을 수락할 수있는 문둥병 환자로서만 이해하려 하심으로써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원장님 자신의 문둥이 천국을 짓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야 가난한 자의 천국은 우선 재산을 누리는 곳에서, 병을 앓는자의 천국은 건강을 되찾는 곳에서 먼저 만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산이나 건강은 그것이 극도로 결핍된 처지에서나 어떤 특수한 천국의 내용이 될 수 있을 뿐, 그것들이 언제 어디서나 모든인간의 궁극적인 천국의 내용일 수는 없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 누구에게서도 너희 병을 용서받아보지 못한 가엾은 문둥이들이므로-. - P387

도대체 어떤 절대 상황 안에 격리된 인간 집단 안에서는 그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협의 관계에 의한 지배 질서란 궁극적으로 그 상황의 벽을 무너뜨리는 순교자적 용기와 희생 없이는 가능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스리는 자의 선의나 정의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의 지배권이 어디에서 연유했든 그것만은 끝끝내 절대 전제가 되어 있는한 다스림을 받는 쪽은 항상 감당해낼 수 없는 상황 자체의 압력 때문에 스스로가 무력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행한 사회의 질서란 우리가 흔히 믿고 있듯이 다중의 희망이나 기도 같은 것과는 일단 상관이 없이 우선은 그 지배자 한 사람의 책임과 각성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슬픈 결론입니다.
결코 장로회 사람들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원장님께서는 다만그 원장님의 천국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섬을 나갔을 때 그들이 육지사람들로부터 당하게 될 지주와 학대를 적절히 설명하심으로써 원생들 스스로 그들의 울타리를 높여가게 하고, 그 울타리 안에 고정된 적절한 상황의식을 되풀이 환기시켜줌으로써 그 장로들과 섬사람들을얼마든지 뜻대로 조작해오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 결국 이 몇 년 동안 원장님과 원생들의 관계에서 한 선의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사이의 어떤 대등한 상호 지배 질서, 만인 공유의화창한 지배 질서가 탄생하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지배자가 어떤불변의 절대 상황 속에 갇힌 다수의 인간 집단을 얼마나 손쉽게 그리고 어느 단계까지 저항 없는 조작을 행해갈 수 있는가 하는 슬픈 지배술의 시범을 보아왔던 셈입니다. 그 지배자가 최초에는 아무리 성실한 인간성과 선의의 명분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갇힌인간의 무리가 아무리 그들의 지배자를 바로 경계한다 하더라도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다 함께 그들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에대한 깊은 각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다스리는 자는 결국 그의 무리를 일방적으로 조작해나가게 마련이며, 다스림을 당하는 자들 또한다스리는 자의 뜻을 재빨리 수락하고 그것에 봉사해나갈 수밖에 없게된다는 말씀입니다. - P397

"자유나 사랑을 행함에는 차이가 큰 일이었지요. 섬사람들과의 한운명 단위 속에서 서로 믿음을 얻고 나면 일단 그 자유나 사랑을 함께 행해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무엇으로 행해가겠소, 사랑은 무엇으로 행해가겠소. 자유나 사랑을 행함에는 절대로힘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힘이 없는 자유나 사랑은 듣기 좋은 허사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유나 사랑으로 이룩해져나감은그 자유나 사랑 속에 깃든 힘으로 해서일 겁니다. 사랑이나 자유의원리가 바로 힘이 아니더라도 그것들이 행해지고 그것들이 이룩해나가는 실현성이나 실천성의 근거는 그 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자유나 사랑이나 다 같이 그 실천적인 힘에 근거하여 비로소 제 값을 지닐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선 두 가지가 같은 차원의가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겠구요. 내 말은 결국 같은 운명을 삶으로 하여 서로의 믿음을 구하고, 그 믿음 속에 자유나 사랑으로 어떤 일을 행해나가고 있다 해도 그 믿음이나 공동 운명 의식은 그리고 그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를잡고 설 때라야 비로소 제 값을 찾아 지니고, 그 값을 실현해나갈 수있다는 이야깁니다."
"원장님께서는 결국 원장으로 다시 섬을 들어오지 못하셨기 때문에, 원장의 권능으로 섬을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그 자우와 사랑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운명을 같이하지 않는 한에서의 어떤 힘의 질서는 무서운 힘의 우상을 낳을 뿐이겠지요. 하지만 운명을 같이하려는 작정이 있은 다음엔 내게 그 원장의 권능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그 허심탄회한의 질서 속에서 섬의 자유와 사랑이 행해져나가야 했었어요. 하지난 이미 이 섬 병원의 원장이 아니었어요." - P408

결혼식 아침날은 기대했던 대로 남해안 특유의 따스하고 화창한 봄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산간을 뻗어 돌아간 황톳길들은 밤사이 함성처럼 피어난 벚꽃 무리로 하여 불을 켠 듯 환하게 뚫려나가고, 벌판을 휘돌아 어우러진 보리밭의 푸르름은 바야흐로 한창 봄의 약동을 합창하고 있는 듯했다. 십자봉을 비껴 흐르는 하늘은 정봉의 소나무 가지보다도 드높았고, 섬을 휘감아 돌아간 득량만의 물빛은 어느새 그 선뜩선뜩하고 암울스런 겨울빛을 말끔히 벗고 있었다. - P413

하지만 이제 자기 목소리에 열이 오를대로 오른 조원장은 자신이 이미 식장의 시간을 늦은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시간이이미 늦어버린 가운데에 그 조원장의 능청스런 축사 연습은 그리고자신의 광기에 못 이긴 기이하고도 진지한 연기는 아직도 한동안이나 더 도도하게 계속돼나갔다.
"이제 두 분에 대한 저의 당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비로소 윤해원과 서미연 두 사람에 대한 그의 당부라는 것을말하기 시작했다.
"두 분에 대한 저의 당부라는 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이미말했듯이 두 분은 기왕에 남다른 사랑과 용기로 이 일을 이룩하였으니 앞으로도 계속 자신들의 방을 허물어뜨리지 말고 누구보다 굳세게 그를 지키고 살찌워나가주시라는 것입니다. 벽을 허물어뜨리고그 벽 대신 따뜻한 인정이 넘나들 믿음과 사랑의 다리가 놓여야 할곳은 많습니다. 다리의 이쪽과 저쪽이 한 동네 한 마을로 섞이고 화목해야 할 자리는 많습니다. 제가 두 분의 신접살림을 직원 지대와병사 지대의 중간에 마련케 하고자 했던 것도 사실은 그런 뜻에서였습니다. 두 분의 결합과 정착지를 시발점으로 하여 하루빨리 이 섬에서부터 두 마을이 하나로 합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분의 정착지가 하루빨리 새로운 마을로 번창하여 이 섬 안엔 건강 지대와병사 지대가 따로 없는 하나의 마을로 채워지기를 빕니다. 이제 두사람으로 해서 그 오랜 둑길이 이어지고 길이 뚫렸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이웃은 힘을 합해 그 길을 지키고 넓혀나갈 것입니다••••••."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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