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일, 기록으로는 그 아이가 죽지 않은 채로 살아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아이도 깊은 수풀 속 어딘가에 남은 조그만 집터처럼 거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는 채 방치되어 있던 이름들이 그 서류 한장에 남아있었다. 이순일은 혼인신고로 본인의 이름을 지우고 사망신고로 그들의 이름을 지운 뒤 그 서류를 보았다는 걸잊었다. 이름 위에 반듯하게 그려진 곱표들과 거기 기록된 망자를 잊었다. 망실된 그들의 이름은 이순일의 삶이 끝날 때 비로소 완전한 망이 될 것이다. 이순일이그 문서를 닫은 사람이었다. 이순일은 거기 적힌 이름들이 겪은 일을 누구에게도 넘길 생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로든 기록으로든 사람은 무언가를 세상에 남길 수 있고, 남기는 데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숱하고 징그러운 이야기를•••••• 그것을 내가 다시 생각하며 말해야 하는가. 이순일은 아이들이 한영진과 한세진과 한만수가 그 일을 이야기로도 겪지 않기를바랐다. - P132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 P146
나는 생각해. 양갈보, 양색시. 노먼은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말 자체를 용서하지 않기로 한 거야. 안나를 고립시키고 무시하고 경멸한 그들과, 그들의 언어를.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아주 강한 동조였다고 생각해. 안나를 양갈보라고 부른 그 사람들과 말이야. 그는 안나의 언어를, 자기 모어를 경멸 속에 내버려둔 거야. - P177
「다가오는 것들」에서 유일하게 로맨스를 경험하는 사람은 나탈리의 남편이었던 하인츠로 그는 영화 초반에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며 나탈리와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자기 짐을 챙겨 나간다. 공유하던 책들까지 그가 멋대로가져간 것을 알고 나탈리는 분노한다. 하지만 나탈리는 바쁘지. 나탈리는 바빠. 영화 후반에 하인츠가 만찬을 준비하는 나탈리의 부엌에 나타날 때에도 나탈리는 바쁘다. 나탈리는 너무 바빠서 하인츠를 용서한 것처럼도 보이지만 하인츠가 외로움을 호소하며 만찬 자리에 자기도 앉기를 바라자 질색하며 거절한다. 미아 한센뢰베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 관한 기대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하미영이 옳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그것이 나탈리를 향해 다가오니까.
가사오니까, 하고 하미영은 말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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