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성운동이 하고 싶었다. 여성은 전쟁의 최대 피해자였다. 남성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전사하면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순국선열의 반열에 올라간다. 그러나 후방의 희생자인 여성들에게는 불명예와 수모가 있을 뿐이었다. 몽골군에게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는 화냥년으로 일제 강점기에 끌려간 ‘정신대‘는 가문의 수치로, 한국전쟁의 피해자는 ‘양공주‘로 낙인찍히고 멸시당했다. 원인은 가부장제였다. 우리말 속에는 남성을 중시하고 여성을 경시하는 말이 수없이많다. 무심코 던지는 말 가운데 스며 있는 여성 비하는 또 얼마나 많은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남자는 도둑질 말고는 뭐든지 해도 된다‘ 등등. 나는 유독 ‘그녀‘ 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그남‘은 없는데 왜 ‘그녀‘라고 하는지. 이는 일본어 ‘가노조‘ 에서 온 일제 문화의 잔재다. 나는 한때 우리말 속에 은연중에 자리 잡은 남성들의 터무니없는 우월 의식과 그 언사를 연구하여 책을 내려고 한 적도 있다. - P39
커리큘럼 중에는 한 사회집단을 정하고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리포트를 내는 논문 대용 과목이 있었다. 나는 교회 중에서도 흑인 교회를 선택했다. 남부는 보수적이고 흑인이 많은 곳이다. 당시만 해도 유색인종을 분리대우해서 버스 좌석도 달랐다. 시골 흑인 교회에는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었다. 주일학교 선생이 문맹일 정도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혹독하게 가난했다. 이런 가난한 흑인 커뮤니티는 내 조국의 농촌 현실과 유사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난한 나라의 유학생이지만 교회에서 한국 전쟁고아 필름을 보여주며 성금을 호소하는 것에 늘 비참함을 느꼈다. 한국에서 온 인사들은 여러 교회를 찾아다니며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타깝고 남루하던지. - P48
이사회 승인을 거친 후 1월 3일부터 출근했다. 학기 중이었으므로 Y양해를 받고 이화여대 출강을 병행했다. 당시 YWCA는 여성계를 선도하는 엘리트 집단이었다. 첫 번째로 벌인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포스터를 만들어 지방 Y로 보내서 전국 곳곳에 붙이고 띠를 어깨에 두른채 가두 캠페인에 나섰다. 좀 더 배우고 젊은 첩이 혼인신고를 해버려서 자식 낳고 살던 조강지처가 오히려 빈손으로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었다. 공개적으로 점을 둔 남자도 많던 때였다. ‘축첩자는 국회에 보내지 맙시다.‘ 5-16 쿠데타 후 첫 국회의원 선거 때 Y가 중심이 되어 각 여성 단체와 연합하여 벌인 가두시위다. 일요일에도 나가서 구호를 외쳤다. ‘첩둔 남편 나라 망친다‘, ‘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등을 붓글씨로 써서 피켓과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국회가 있는 태평로, 종로, 을지로, 명동 거리에서는 행진으로 시위했다. 지금도 가끔 TV에서 해방 특집 방송이나 시대다큐멘터리에 이 장면이 나온다. - P53
‘부정선거 다시 하자!‘ ‘민주주의 사수하자!‘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 경찰의 발포로 젊은 목숨이 무수히 피를 흘렸다.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국 선언을 발표하고 시민들이 합세하자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종용했다. 그는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부통령 이기붕 일가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기도 했던 장남 이강석이 부모와 형제를 모두 쓰고 자살하는 비극으로 마감했다. 나는 이번에는 솔선해서 Y 직원들과 경복궁 동문앞 수도육군병원에서 열린 추모예배에 참석해 망자에 대한 예우를 다했다. 그때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들어와 앞에 놓인 4개의 관을바라보는 그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건국의 국부에서 장기 집권 독재자로 추락한 초라한 뒷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학생 시위대가 이기붕 집을 습격했을때 냉장고에서 나온 물품 중에서 수박이 단연 화제였다. 수박만 한 황금 덩어리가 나왔다고 해도 그렇게 얘깃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냉장고도 생소했지만 비닐하우스도 없던 그 시절의 ‘4월 수박‘은 보통 국민들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망자가 190여 명, 부상자 또한 이보다 많았다. 85세의 노구를 끌고 쓸쓸히 망명 길에 오르는 이승만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착잡했다. 독립운동과 건국 대통령으로 민주주의에 입각한 삼권분립제도의 기틀을 다진 것은 그의 업적이 분명했다. 북한 공산주의와 맞서 나라를 지킨 국부로서 추앙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를 각계에 중용함으로써 ‘사회정의‘가 뿌리째 흔들렸다. 또한 자신의 장기 집권을 위해 헌법을 누더기로 만들었다. 3.15 부정선거는 그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 P55
김활란 박사는 1939년 한국인으로 첫 이화여전 교장에 올랐다. 1940년에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학교 요직을 차지하고 들어온 일본인들은 김활란교장을 핍박했다. 그들은 한복 대신 몸뻬 바지를 입게 하고 트레머리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또한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을 독려했다. 그런 가운데 철없는 학생들은 김활란의 서툰 일본말이 재미있어 까르르 웃었다. 나는 선망했던 인물이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본 셈이다. 선교사들이 돌아간뒤 이화여전은 미국에서 지원되던 후원금이 막혀버렸다. 일본인들이 기독교 학교를 없애려고 혈안인 가운데 학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받은 수모와 오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이화여전에 입학한 1942년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에 물자와 인적 자원 수탈로 광분한 시기다. 일본인들은 강제징용, 학도병, 정신대로 식민지 백성 총동원령을 내리고 본의든 강제든 저명한 조선인들을 앞장서게 했다. 동원에 그들의 명성을 이용하고 조선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을 더럽혀 구심점을 없애려는 이중 속셈도 있었다. 김활란 박사는 표적이었다. 조선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30년 이상 지속된 식민지 조국은 언제 해방될지 모르는 캄캄한 터널 속이었다. 끝내는 학교 간판이 떼어지고 교장직에서 쫓겨났으며,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일본인들이 강요하는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아주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 당시 어용 매체 <매일신보> 등에 실린 글을 지금 읽어보면 그는 변명할 수 없는 친일파다. 1943년 12월 25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글의 일부다.
반도 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일으키어 특별 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린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 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바로 위의 조치로 이화여전이 문을 닫고 1944년 4월초 재학생들은 강제로 졸업을 당했다. 2년 만에 졸지에 학업이 중단된 나는 망연자실한 채로친구 몇 명과 함께 김활란 박사를 찾아갔다. "선생님,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애처롭게 우리를 바라보시던 그분은 조용히 붓을 들고 글을 써 내려갔다. 명필로도 유명한 그분은 그 글을 내게 주셨다. ‘百忍百勝(백인백승).‘ 백번 참으면 백번 승리하리라. 일본인들에게 치욕을 당하면서 자신에게 다짐하는 말이었으리라.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참고 살아남으라는 당부를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교장직에 연연해 일본에 협조한다‘는 빈정거림이 없지 않았다. 글을 받아 든 그때의 이심전심이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깊숙이 새겨져 지금 그를 위해 변명하는 용기와 의무감을 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당시 그의 심정을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 중에서 인용한다.
1944년 여름 나는 그들에게 끌려서 징병 유세를 다녀야 했다. 감시와 강요하에 살이 떨리고 양심이 질식할 징병 유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영혼을 새카맣게 불태우듯 나를 어둡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그때까지 이화를 지켜보겠다고 버둥거리며 남아 있다가 이러한 일마저 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가 정작 친일파였다면 일본어에 서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는 목적을 갖고 선택하는 언어다. 1918년에 이화학당 대학부를 졸업할때 그는 유창한 영어 연설로 유명했다. 똑똑한 여성의 대명사였던 그가 자발적 친일파였다면 그 도구인 일본어도 무척 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시대 나는 스무 살이 넘는 성인이면서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 나는 오히려 황국신민을 교육하는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 과정에 들어갔다. 이를 두고 남편은 가끔 나를 친일파라고 놀린다. 학업을 중단하지 않으려고, 서산으로 내려가기 싫어서, 농촌 계몽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차선책으로 이 과정을 이수했다. 내 나라 없는 설움보다 더한 슬픔이 또 있을까. 빼앗긴 조국은 우리의 사랑이었으며 종교였다. 그 이후 김활란 박사는 5·16 군사 쿠데타를 미국에서 승인하지 않자미국을 설득하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와 동아일보사 최두선 사장과 함께 미국을 방문했다. 정계, 언론계, 교계, 동포 사회에 쿠데타의 필연성을 설명하고 다녔던 분이다. 귀국하여 박정희 장군에게 보고하고 지지를 천명했다. 5·16 이후의 그의 정치적 행적에 나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당시의 고뇌와 그 현장을 지켜보았던 사람으로서 침묵을 지키는 것도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 P57
박정희 소장 중심의 정치군인들은 이 혼돈을 이용해 1961년 5월 16일쿠데타를 일으켰다. 연일 각종 시위가 벌어졌던 서울 중심은 장갑차에 의해 점령되었다. 무질서에 지친 국민 중에는 혼란 다음의 억눌린 정적을 질서라고 착각하고 총을 든 군인을 반기는 일면이 있었다. 민주주의가 어쩔수 없이 유발하는 혼란에 우리 국민은 익숙하지 못했다. 미국은 쿠데타를인정하지 않았다. 마셜 그린Marshall Green 주한 미국 대리대사와 카터 매그루더Carter Magruder 유엔군사령관은 "우리는 장면 내각을 지지한다"라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장면 국무총리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혜화동 칼멜수녀원의 깊숙한 방에 숨어버렸다. 행방불명이 된 총리와 군통수권자인 윤보선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쿠데타를 인정하게 된 셈이었다. - P68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며 나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 타이밍도 작용했다. 그즈음 나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전쟁 중 앓는 사람을 두고 매정하게 유학을 떠나버린 데 대한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다행히 병마와 싸워 기사회생한 그 사람이 같은 서울에 혼자 있어 부담스럽기도 했다. 내가 결혼한 후 그분도 혼인하여 아들을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홀가분해졌다. 재야 민주화 운동에 평생을 바치며 단벌옷에 흰 고무신을 신고 살았던 그분은 내가 청와대 안주인이던 시절에 타계했다.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 명복을 빌었다. 끝내 ‘말없이 떠나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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