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지난 뒤, 땅이 얼기 전에.
이순일은 여러차례 그렇게 말했고 이제 그때가 되었다.
11월 둘째 주였다. 한세진은 아침 여섯시에 차를 몰아 집을 나섰고 별다른 막힘 없이 올림픽대로를 달려 이순일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 셔터를 내린 차고 앞에 차를 바짝 붙인 뒤 엔진을 끄자 바로 시트가 식었다. 추운 날이었다. 해가 완전히 뜨고 나면 기온이 조금 오르겠지만 그날의 목적지는 군사분계선 근처였고 이맘때 그곳의 한낮은 여기 밤보다 추웠다. 매년 그랬다. - P11

본래도 많지 않았던 일가친척은 대부분 한국전쟁의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와중에 묻힌 곳도 간 곳도 모르게 사라졌고, 살아남은 혈육인 할아버지가 나이 다섯인 이순일을 거둬 밥을 먹이고 심부름도 시키고 하다가 손녀 나이 열다섯 때 먼 친척이 산다는 김포로 보냈다. 이순일은 거기서 시장 일을 돕다가 시장상인의 중매로 만난 한중언과 결혼했다. 길이 멀고 교통도 편치 않아 결혼식에 노인이 못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가 낡은 솜두루마기를 입고 찾아와 결혼식장에 앉아 있다가 국수를 먹고 갔다고, 이순일은 한세진에게 말하곤 했다. - P16

그런 거 아냐.
너무 효도하려고 무리할 필요는 없어.
효?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답했다.
그것은 아니라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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