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 없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미는 모자수의 연인이었고무엇보다도 지혜로운 친구였다. 누구도 유미를 대신할 수 없었다. 이런 말을 유미에게 한 적이 없다니 자신이 유미의 진가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몇 년이 아니라 오래오래 유미와 함께 살 줄 알았다. 우스운 행동을 하는 손님 이야기를 이제 누구에게 말한단 말인가? 장례식장에서 누구보다도 의젓하게 목발을 짚고 서서 어른들과 악수하는 아들의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누구에게 말한단 말인가? 조문객들이 검은 정장을 입은 어린 사내아이를 보고 눈물을 흘릴 때 솔로몬은 "울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한 여자한테는 "엄마는 캘리포니아에 있어요"라고 말하며 위로하기도 했다. 그 여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을 때 솔로몬도 모자수도 그 말의 뜻을 설명하지 않았다. - P154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선자는 쉰두살이었다. 반점과 주름이 생기지 않게 항상 부지런히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는 경희는 선자보다 열네 살이나 많았지만 훨씬 젊어 보였다. 선자는 흰머리가 늘어나고 있는 짧은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한 번도 아름다웠던 적이 없었고, 지금도 분명 어떤 남자도 자신을 원할 리 없었다. 선자의 삶에서 그런 시절은 이삭의 죽음으로 끝났다. 평범한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했다. 허리와 허벅지도 굵어졌다. 얼굴과 손은 부지런히 일하는 가난한 여자의 것이었고, 아무리 지갑에 돈이 많다 한들 무엇도 선자를 매력적으로 만들수 없었다. 오래전, 목숨보다 더 한수를 원했다. 한수와 헤어졌을때도 그가 돌아와 자신을 찾아내서 붙잡아주기를 바랐다.
한수는 일흔이었지만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용모가 더 준수해진 것 같았다. 숱 많은 백발을 여전히 세심하게 다듬어 향유를 발라 손질했다. 고급스러운 모직 정장을 입고 멋진 구두를신은 한수는 고상한 정치인이나 잘생긴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누구도 한수를 야쿠자 두목으로 생각할 리 없었다. 선자는 욕실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외출하기 전에 굳이 거울을 보지도 않았다. 보기 흉하거나 부끄러운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여자의 일생에서 누구한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시기가 너무 이르게 찾아왔다.
선자는 차가운 물을 틀어서 세수를 했다. 어찌 됐든 한수가 자신을 조금은 원하기를 바랐다. 그런 마음을 깨닫자 당황스러웠다. 선자의 삶에는 두 남자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 정도면 됐다. 선자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불을껐다. - P171

 수없이 되풀이한 노력을 증거로 내놓고 싶었다. 엄마라는 것은 딸이나 아내, 이혼녀, 여자친구, 식당 주인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에쓰코의 본질에 가까웠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 일은 에쓰코 자체였고, 내면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다쓰오가 태어난 순간부터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슬픔과 회의감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더라도 한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였다. 엄마라는 에쓰코의 삶의 일부는 죽어서도 끝나지 않을 터였다. - P243

 에쓰코가 젊은 엄마이던 시절에 깨어 있는 동안 마음의 평화를 느낀 유일한 시간은 밤에 아이들이 자러 간 후였다. 에쓰코는 그 시절 모습 그대로의 아들들을 보고 싶었다. 통통하고 하얀다리, 이발소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해서 이상하게 잘린 바가지 머리를 보고 싶었다. 그저 피곤해서 아이들을 야단치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잘못을 너무 많이 저질렀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이들이 조금 더 오래 욕조에서 놀게 두고 자기 전에 이야기책을 하나 더 읽어주고 새우튀김을 한 접시 더 만들어주고 싶었다. - P246

"노아는 책 읽기를 좋아했어요. 그 무엇보다도요. 책 읽기를 정발 좋아했어요."
"디킨스의 책을 읽어보셨어요?"
"몰라요." 선자가 말했다. "글 읽을 줄...…."
"정말요? 노아 님 어머님이시니 보쿠 상도 아주 똑똑하실 텐데요. 어른들이 다니는 야간학교에 다니시면 되겠어요. 노아 님이 저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거든요."
선자는 노인을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는 관리인에게 미소를 지었다. 공부하자고 모자수를 꼬드기던 노아가 기억났다.
관리인이 갈퀴를 바라봤다.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서일을 하러 돌아가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관리인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선자는 묘비 밑에 맨손으로30센티미터 정도 깊이로 구덩이를 파고 사진이 달린 열쇠고리를묻었다. 흙과 풀로 구덩이를 메우고 나서 손수건으로 열심히 손을 닦았지만 손톱 밑에 흙이 남아 있었다. 땅을 밟아 다지고 손가락으로 풀을 털었다.
선자가 가방들을 집어 들었다. 경희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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