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함께 여행을 떠나요

2001년, 저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인류학과에서 조교수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왔습니다. 미국에서 10년 가까이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잦은 이사로 짐이 거의 없었고, 일본에서 박사 후 과정을 끝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짐을 한 번 더 줄인 상태였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짐을 부치면서 내친 김에 자동차까지도 함께 보낼 참이었습니다. 당시 몰고 다니던 1994년형 닷지 미니밴 ‘보이저‘는 수동으로 창문을 여닫고, 에어컨도 없고, 오디오 시스템이라고는 달랑 라디오 하나 있었지만 그래도 잔 고장 하나없는 믿음직한 자동차였습니다. 그러나 짐을 모두 보내고 홀가분하게 학교에서 제공해 주는 비행기 편에 몸을 실어 이사를 하려던 계획은이내 벽에 부딪혔습니다. 지도 교수가 직접 차를 몰고 가보라고 권한것입니다. 저는 안 된다고 펄펄 뛰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가서 자리를 잡고 싶기도 했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였고 솔직히 겁이 났습니다. 결국은 미국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이 소중한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지도 교수의 끈질긴 설득에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 P5

인류의 진화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에서 되풀이되는 것은 "정답은 없다." 입니다. 진화에 유익한 형질, 적응에 유리한 형질은 우연의 작품입니다. 우연히 이루어진 환경 변화 속에서 마침 우연히 생겨난 형질이 유익했고, 유익한 형질을 가지고 있는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겼을 뿐입니다. 어느 한때 유익하다고 영원히 유익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수백만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인류의 진화 역사를 들여다보아도 그렇습니다. 길게 보면 커다란 흐름이 있습니다. 직립 보행이 그렇고, 두뇌용량의 증가가 그렇고, 문화에 대한 의존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직선이 아닌, 꼬불꼬불한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고, 환경에 맞는 선택의 결과입니다. 가장 좋은 선택을 고민하기보다는 그때 적합한 선택을 해서 앞으로 나아갔던 것뿐입니다. - P14

포레 족은 지금은 더 이상 이런 장례를 치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널리 행해졌던 장례였지요.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끔찍한 장례를 치렀을까요? 바로 죽은 사람을 먹으면 그 사람이 살아 있는사람의 일부가 돼 동네에 계속 살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이러한 믿음은 그리 낯설거나 특이한 게 아닙니다. 일부 다른 문화권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존의 야노마모 족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화장한 뒤 재를 죽에 섞어 친척이자 이웃인 마을 사람들끼리 나눠 먹습니다. 비유이긴 하지만, 기독교 성찬식에서는 예수가 빵을 뜯어서 자신의 몸이라고 믿고 먹으라 하고, 포도주를 따라서 자신의 피라고 믿고 마시라 권합니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포레 족의 식인 풍습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끔찍한 모습을 걷어내면, 그 안에는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의 사랑이 있습니다. - P29

하지만 주의할 게 있습니다. 식인 ‘행위‘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곧식인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앞서소개한 포레 족에서처럼, 인류 역사에 식인 행위는 분명 있었습니다. 보다 오래전으로 돌아가 봐도,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고인디언 유적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존재했습니다. 심지어 현대 사회에서도 식인이 용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데스산맥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한 예지요. 이들은 생존을 위해 죽은 동료의 시신을 먹었습니다. 미국에서 서부 개척을 위해 이주하다 길을 잃고, 결국 식인으로 연명하다가 겨우 일부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극한 상황에 몰려 예외적인 행위를 한 이들을 식인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만약 2010년에 남미 칠레에서 무너진 탄광 속에 갇혔던 광부들이 극한 상황에서 비슷한 일을 했다고 해도, 도덕적인 잣대로 이들을 ‘식인종‘이라 부르며 심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래전 인류의 화석은 우리에게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해 볼 것을 요청합니다. 이들은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인육을 먹었을까요? 혹시 원수를 갚으려고 신체 일부를 삼킨 건 아니었을까요? 혹은 플라이스토세라는 척박한 빙하기의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선택을 했을까요? - P31

이런 동물에게 서열 경쟁에서 우위를 지키게 하는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몸집과 송곳니입니다. 수컷에게는 이 두 가지가 최대한 크고 강할수록 유리하겠죠. 유인원 가운데에서 이런 특성을 보이는 종이있을까요? 바로 고릴라가 그렇습니다. 고릴라는 암수 사이에 몸집, 두개골, 송곳니 크기가 대단히 큰 차이를 보입니다. 암수 사이의 크기 차이는 수컷끼리의 경쟁을 알려 줍니다. 암컷에 비해 수컷의 몸집이 크면 클수록 수컷끼리의 경쟁이 매우 치열했음을 나타내지요. 실제로 고릴라는 짝짓기를 할 때는 수컷이 미리 힘 대결을 펼쳐 서열을 정해 두고, 가임기가 되면 높은 서열을 지닌 수컷만 암컷에 접근하는 모습을보입니다.
한편 고릴라와 반대에 서 있는 유인원도 있습니다. 침팬지입니다. 침팬지의 암컷은 모두 서로 다른 시기에 가임기를 맞습니다. 365일 내내 임신 가능한 암컷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수컷 침팬지에게는 대단히 고민스러운 상황입니다. 아무리 힘이 센 수컷이라도 1년 내내 암컷을 감시하며 다른 수컷들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거든요(고릴라는 가임기에만 반짝 지키면 됩니다.). 암컷 입장에서도 시름이 깊습니다. 고릴라 암컷처럼 편하게 앉아 기다리면 검증된 강한 수컷이 다가오는 상황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암컷 침팬지는 고릴라와 전혀 다른 전략을 개발했습니다. 가능한 많은 수컷과 짝짓기를 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수컷 역시 최대한 많은 암컷과 짝짓기를 합니다. 실제로 다수가 무리를 이뤄 사는 침팬지 수컷은 서열 다툼을 별로 벌이지 않기 때문에 따로 강한 수컷이존재하지 않고, 누구나 가임기 암컷에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침팬지 무리에서는 교미가 1년 내내 벌어집니다. 그럼 다른 수컷을 물리치고 자신의 새끼를 남기고 싶은 수컷은 도대체 무엇으로 경쟁을 할까요? 바로 정자입니다. 수컷은 최대한 많은 정자를 내보내 다른 수컷의 정자와 경쟁시킵니다. 이 경우,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비결은 최대한 많은 정자를 만드는 일입니다. 커다란 몸집은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고환만 크면 됩니다. 그래서 침팬지는 몸집이나 두개골 크기는 암수가 별로 차이 나지 않지만(송곳니만은 차이가 크게 납니다.), 유인원 가운데 몸집에 비해 가장 거대한 고환을 갖고 있습니다. - P40

 결국 고릴라도 침팬지도 둘 다 진짜 아버지를 알수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침팬지와 고릴라 가운데 어떤 짝짓기 방식도 수컷에게 "암컷이 낳은 자식이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내 자식이다."라는 보장을 못합니다.
이 경우 유인원 수컷이 취할 전략은 일단 태어난 새끼에게는 더 이상 정성을 들이지 않고 오직 많은 새끼를 만드는 일에만 ‘올인‘하는 것입니다. 짝짓기에만 열중하고 육아에는 에너지를 쓰지 않는 방식이죠.그래서 유인원의 세계에는 ‘키워 주는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침팬지에게는 아버지가 없다"는 말의 속뜻입니다.
하지만 인류는 다릅니다. 고릴라처럼 몸집이 크지도 않고, 침팬지처럼 고환이 크지도 않은 인간의 남자는 다른 영장류와 전혀 다른 전략을 개발했습니다. 바로 ‘새끼 키우기‘에 공을 들이는 방법입니다.
최초로 두 발로 걸은 인류를 생각해 봅시다. 여성이 임신 혹은 수유중일 때는 이동이 쉽지 않습니다. 이들은 좁은 지역을 돌며 식물성 먹을거리를 수집했습니다. 반면 딸린 몸이 없어서 두 손이 자유로운 남자들은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동물성 먹을거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남자는 이렇게 해서 가져온 먹을거리를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데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유리한 전략은 뭐니 뭐니 해도 가임기 여자의 환심을 사는 것이겠죠. 그런데 임신이나 수유 중인 여자는 어떨까요? 배란이 억제돼 있으므로 환심을 사 봤자 자손을 남기는 데 하등 유리할 게 없습니다. 그냥 먹을 것을 갖다 주지 말고, 다른 여자를찾는 게 나을까요? 하지만 변수가 있습니다. 만약 여자의 뱃속에 있는아이, 혹은 젖먹이 아이가 자기 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여자와 아이에게 먹을거리를 나눠 주는 일은 자신의 자손을 남기는 데 대단히 유익한 일이 되기 때문이죠. - P42

이제 여자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여자에겐 남자가 계속 자신에게 고기를 가지고 오게 하는 것이 이득입니다. 하지만 가임기는 기껏해야 한 달에 하루, 이틀입니다. 그럼 나머지 날에는 남자가 가져오는고기를 받을 수 없는 걸까요? 여자가 내놓은 해답은 위장 전략입니다.
자신이 항상 가임기인 듯 속여서 계속해서 고기를 받으면 되죠. 가장확실하게 속이는 방법은 남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속일 뿐 아니라, 아예 여성 자신도 자신의 가임기를 모르게 됐습니다. 가임기를 정확히 모르는 인간은 늘 수시로 성교를 해야 했고, 남자는 계속 같은 여자에게 되돌아오게 됐습니다. - P44

인간의 아버지는 생물학적인 관계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믿음)을통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몸 역시 그에 맞춰 진화했습니다. 남자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갖게 되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듭니다. 남성 호르몬은 생물학적인 ‘수컷다움‘을 관장합니다. 이 말은 ‘수컷 노릇의 사령부‘가 아버지 노릇을 위해 퇴진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러브조이 가설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수컷과 암컷이기도 하지만, 생물학을 넘어선 사회 문화적인 존재입니다. 아버지의 탄생은 그것을 증명합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 P48

르(Hadar) 유적, 탄자니류 화석들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Australopithecus Afarensis‘는 새로운 종으로 분류됐는데, 연대측정 결과 300만~350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때까지 발견된 종중 가장 오래된 인류 조상 화석입니다(유명한 ‘루시(Lucy)‘가 바로 이 중에 속합니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가장 오래된 화석이라는 점 말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발견이 고인류학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인류 진화 역사에서 두 발로 걷게 된일(직립보행)이 커진 두뇌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입니다. 최초의 인류는 두뇌를 기준으로 찾아야 할 게 아니라, 두 발로 걸었다는 증거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두뇌는 침팬지 정도 크기에 불과합니다. 치아는 큰 편이고, 도구 사용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보나 인류보다는 침팬지의 조상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단 하나가 달랐는데, 그게 바로 두 발로 걸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골격에서도 직립 보행의 흔적이 보였고, 탄자니아의 라에톨리 유적에서 발견된 발자국 화석은 두발로 걸은 뚜렷한 증거를 남기고 있었습니다. 이제 최초의 인류를 찾으려는 노력에도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직립 보행을 한 흔적이 있는지가 인류의 조상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가 됐습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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