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아는 모든 조선인은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본의 영토 확장 전쟁이 무분별하다고 여겼다. 중국은 조선이 아니었고, 대만이 아니었다. 중국은 백만 명을 잃고도 계속 버틸 수 있었다. 중국은 일부 지역이 함락된다 해도 여전히 엄청나게 거대한 나라였다. 사람 수와 의지만으로도 버틸 수 있는 나라였다. 조선인들이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랄까?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일본의 적이 이기면 조선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각자 살 방도를 궁리해야 한다는 것이 조선인들이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었다. 가족을 지켜라. 자기배를 채워라. 정신 바짝 차리고, 지도자들을 믿지 마라.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세하게 해라 적응해라. 지극히 간단하지 않은가?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는 애국자들이나 일본 편에 선 재수 없는 조선 놈들이 있는가 하면, 이곳에서나 또 다른 곳에서 그저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수많은 동포가 있었다. 결국 배고픔 앞에 장사없는 법이었다. - P275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아들을 다정하게 대할 수 있었다. 부모가 자식을 칭찬하면 안 되고, 그랬다가는 화를 불러올 뿐이라는것을 선자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선자가 잘한 일이있으면 항상 칭찬했다. 선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조차 아버지는 습관처럼 선자의 정수리를 쓰다듬거나 등을 토닥거렸다. 다른 부모였다면 딸을 응석받이로 키운다고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불구인 아버지가 자식의 멀쩡한 이목구비와 팔다리에 감탄하는 것에는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선자가 걷고 말하고 간단한 암산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선자는 아버지의 따뜻하고 다정한 말을 반짝이는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며 의지했다. 누구도 칭찬을 바라서는 안 되고, 특히 여자는 더 그러했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 선자를 아주 애지중지하며 길렀다. 선자는 아버지의 기쁨이었다. 선자는 노아도 그렇게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었고, 아들들을 보내준 하나님에게 온 마음을 다해 감사했다. 남편의 형 집에서는 하루도 더 못 살겠다 싶은 날들이 있었다. 늦은밤까지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감옥에 가서 남편 밥을 건네주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럴 때면 선자는 단 한 번도 자기에게 언성을 높이지 않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기쁨이라는 것을, 아들들이 선자의 기쁨이라는것을 상기시켜주었다. - P284
"모자수" 이삭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노예에서 해방시켰죠…." 머리가 너무 심하게 욱신거려서 다시눈을 감아야 했다. 두 아들이 자라서 학교를 마치고 혼인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렇게 간절하게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데, 오래오래 살고 싶어진 지금에서야 죽음을 앞두고 집에 보내졌다. "나한테 두 아들이 있어요." 이삭이 말했다. "나한테 두 아들이 있어요. 노아와 모자수가. 우리 아들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있기를" 선자는 이삭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이삭의 얼굴이 낯설면서도 평온해 보였다. 선자는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계속말했다. "모자수가 많이 컸어예. 늘 밝고 낯도 안 가려에 웃는 게 억수로 이쁩니더. 아주 사방을 뛰어댕겨예. 엄청 빨라예!" 선자는 양팔을 흔들며 아기가 아장아장 뛰는 흉내를 내다가,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고 이삭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순간, 모자수가 얼마나 잘 자라고 있는지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세상에 자신 외에도 단 한 사람 더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선자는 아이들에 대한 자랑스럽고 기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요셉과 경희가 두 아이를 예뻐했지만 선자는 아이가 없는 두 사람의 슬픔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때때로 선자는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서 자신의 기쁨을 두 사람에게 숨겼다. 고향에서는 건강하고 착한 두 아들을 가진 것이 어마어마한 부자가 된 것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선자에게는 집도 돈도 없었지만 노아와 모자수가 있었다. 이삭이 눈을 뜨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제 아이들을 볼 때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주님. 제 아이들을 보고 축복해줄 때까지는요. 주님, 저를 아직 데려가지 마시옵소서••••••." 선자도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이삭이 다시 눈을 감았고 어깨가 고통으로 움찔거렸다. 선자가 끊어질 듯 약한 숨결을 확인하려고 오른손을 이삭의 가슴에 놓았다. - P299
"그럴 거예요. 내가 공산주의자인지 나도 모르겠어요. 난 일본이 조선을 다시 넘겨받는 것에 반대해요. 소련과 중국이 조선을통치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미국이 차지하는 것도 싫고요. 왜조선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창호 씨가 방금 말했듯이 우리는 서로 싸우고 있잖아요. 꼭 할머니 둘이 말다툼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상대방의 못된 점을 할머니들 귀에 대고 계속 속삭이면서 부추기고 있는 것같아요. 할머니들이 화해하고 싶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 말은 무시하고 두 사람이 한때 친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누님을 지도자로 올려야겠는데요." 창호가 집을 향해 수레를 밀면서 말했다. 잠깐 걷는 길이었지만 경희와 같이 있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원하게 됐다. 때로 경희 옆에 있기가 너무 버거워서 그런 모임에 나갔다. 한편으로는 날마다 경희를 볼 수 있기에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창호는 경희를 사랑했다. 이 마음이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집까지 몇 걸음밖에 남지 않자 두 사람은 느릿느릿 걸으면서 그날 하루 일어난 이런저런 일을 소곤거렸다. 마음이 퍽 흡족했고 수줍음이 조금 줄었다. 김창호는 계속 사랑의 고통을 겪게 될 터였다. -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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