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내 소개부터 하자면, 나는 소설가다. 그 사실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내로라하는 두뇌 전문가들이 플라이스토세에 발생한 인간의 서사 능력이 진화의 주요 동인이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야기 재주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우리의 언어는 「워킹데드(미국의 좀비 드라마) 수준일 것이고, 오늘 우리가 하는 인간 가치관 논의 따위는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여, 이야기꾼을 비웃지 말지어다. 내 분야는 그대들의 분야보다 뿌리 깊다." 문학이 인류를 발전시켰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박수를 보낸다. - P125
역설적이게도 마거릿 애트우드는 희망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디스토피아 소설을 발표했다. "인류는 과거에 여러번 끔찍한 병목을 통과했다. 그리고 매번 살아남았다." 그녀는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지금도 "새로운 소설"을쓰고 있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여전히 글을 쓴다는 80대의 현역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 그녀는 자신이 가진 어떤 화려한 이력보다도 메리 웹스터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한다. 17세기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마녀로 몰려 교수형에 처해진 메리 웹스터는 밤새도록 밧줄에 매달려 있었지만 죽지않았다. 다음 날 아침 밧줄이 끊어질 때까지 숨을 쉬고 있었던 메리 웹스터는 그 이후로도 14년을 더 살았다. 실제로 메리 웹스터가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얼마나 가까운 선조인지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고 살길을 모색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일관되게 글로 써 온 마거릿 애트우드는 마녀로 몰려 목이 매달렸지만 살아남은 메리 웹스터와 어딘지 모르게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캐나다의 적막한 숲 속에서 곤충을 관찰하며 혼자 책을읽고 글을 쓰던 어린 소녀가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살아 있고지금도 글을 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다음 작품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더 많은 독자들이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을 만나길 바란다. 분명 세상이 좋아질 것이다. 글 쓰는 여자는 결국 승리한다. - P130
"애틀랜타나 조지아 같은 곳에서는 서점과 도서관 책장에서 제 책을 빼버리기도 했어요. 흑인들이 그랬지요." 토니 모리슨은 현명했다. 화가 난다고 다음 작품을 망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글로 쓰기엔 분노는 너무 시시하고 연민은 너무 질척거리는 감성"이었다. 토니 모리슨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과 글의 힘을 믿었다. "저는 세 살쯤 되었을 때 언니와 함께 조약돌로 보도에 글자를 쓰곤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울타리에 어떤 단어가 검정 페인트로 크게 적혀 있었는데, 우리는 그 글자를 따라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에프(f)를 쓴다음 유(u)를 썼지요. 그러자 어머니가 고함을 지르며 계단을 내려오더니 ‘가서 빗자루 가져와 물도 한 통 가져오고. 너희 대체 왜 그러니?"라고 말했습니다. •••••• 아무튼, 그때 저는 말의 힘에 대해서 두 가지 사실을 배웠습니다. 말은 어머니를 완전히 기겁하게 만들 수 있었지요. 또 조약돌로 보도에 글자를 쓰는 것만으로도 아주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토니 모리슨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비판을 모두 "폭발적인 반응"이라고 해석하며, 작가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했다. lll았다 1987년 『빌러비드』를1-1-1.⠀⠀⠀...... - P165
어느 날부터인가 나딘 고디머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일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내가 다니던 수도원 학교는 모두 백인 아이들이었고 토요일 오후에 극장을 가도 모두 백인뿐이었습니다. 나는 지방 도서관에 다녔는데 흑인들은 들어갈 수 없었어요." 만약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학교를 다니며 책을 마음껏 읽고 작가의 꿈을 가질 수 없었을것이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이 왜 자신과 같은 보통 사람들의 몫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폭력적이고 모순적인 제도가 사회를 분열시키고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음을 자각하자 분노에 휩싸였다. 반드시 작가가되어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겠다고 결심한다. - P170
1919년 4월, 가네코 후미코는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반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늙은 친척에게 돈을 받고 딸을 팔아넘기려 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결혼을 빙사한 인신매매를 거부했고, 아버지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떠나기로 결심한다. 무엇보다 도쿄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내 생활을 스스로 개척하고 스스로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은 나날이 강해졌다. "운명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덕에 나는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과거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아버지여, 안녕"을 외쳤다. - P178
"정작 죽음의 공포, 암이라는 병에 대한 불안은 가을, 회복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언덕길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아이들이 뛰어가고 시장바구니를 든 주부가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은, 모든 생명, 나뭇잎을 흔들어 주는 바람까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박경리는 퇴원하자마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것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100장을쓰고 나서 악착스러운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박경리가 《현대문학>에 1969년 6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토지』는 각 부마다 연재 지면이 바뀌는 곡절을 겪으면서도 1994년총 5부 16권으로 완간되었다. 집필 시간만 25년, 원고지로는3만 1,200장 분량이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 P190
극심한 가난도 어린 박경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민학교 때 수업료 때문에 몇 번씩 집에 쫓겨 가야 했던 일은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부끄러움이겠습니다만 우연히 장롱 속에서 수업료의 천 배가 넘는 백 원짜리 지폐들을 접어서 넣은 전대를 발견했을 때의 슬픔, 돈을 보았노라 했을 때나를 보던 어머니의 험악한 눈은 타인의 눈이었습니다." 그래도 박경리는 "인생은 물결 같은 것"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다만 그 "물결"은 어김없이 거칠고도 잔인했다. 1946년 결혼한 박경리는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편을 잃었고, 몇 년 후에는 어린 아들마저 세상을 떠난다. 참척의 고통은 혼자만의 몫이었다.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암흑시대」는 아이를 홍제동 화장터에 갖다 버리고 돌아온날부터 책상에 달라붙어 쓴 것이고, 「불신시대」는 아이를잃은 후 거미줄처럼 보이지 않게 인간들을 휘감아 오는 사회악과 형식화되면서 위선의 탈을 쓴 종교인과 인간 정신이 물체화되어 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쓴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박경리는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하나의 어린 생명이 부당하게 그리고 처참하게 도수장의 망아지처럼 없어졌다는 일은 도처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사소한 사건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슬픔을 겪으면서도 박경리는 자신의 고통을과장하지 않았고, 더 큰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품위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 P191
"마음속으로 온갖 고통을 꾹꾹 누르고 있다가 마지막해를 넘기는 날 같은 때에는 한 번씩 창자가 끊어지듯 우셨어요. 어머니는 마치 온몸을 부숴 버릴 듯 통곡을 하시고 난 다음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단정하게 앉아, 그야말로 모질게 원고지 앞에 앉아 펜을 드시곤 했습니다." 한평생많이 슬프고 크게 아팠던 박경리는 그 고통 앞에 굴복하지않았다. 글을 써 내려가며 그 무엇에도 "눌리지는 않으리라는 독한 마음"을 지킬 수 있었다. 2008년 4월 박경리는 마지막 시를 남긴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모진 세월은 그냥 물러가지 않았다. 억울하고 혹독했던 시간들과 싸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살기 위해서 박경리는 소설을 썼다. "소설이란 삶과 생명의 문제이며, 삶이 지속되는 한 추구해야 할 무엇이지요." 글 쓰는 여자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 P1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