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총장을 지낸 형법학자 유기천이 대만에서 고위충 인사에게 김기춘이 한국에서 대만 총통제를 연구하러왔다 갔다는 말을 듣고는 이를 수업 시간에 얘기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내란선동 혐의로 입건된 뒤 자의반 타의 반 망명길에 오른 직후의 일이다. 이때 김기춘은 신직수 밑에서 극비리에 유신헌법을 만드는 작업에 깊숙이 간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P190

현재 강기훈의 유서 대필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났37고,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다. 검찰의 시나리오가 허위라는 새로운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 사건은 민주화로 중앙정보부-안기부가 체제 유지의 전면에서 한발 물러선공백 상태에 발생한 위기를 검찰이 온몸을 던져 막은 것이었다. 유서대필이란, 지금이나 그때나 말이 안 되는 사건이다.
검찰도, 수구 세력도 그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런황당한 주장을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밀고 나가야 할 만큼 노태우 정권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검찰이 주도한 유서 대필 사건은 군과 정보기관이 퇴조한 가운데 검찰이 체제 유지의 주력부대임을 과시함으로써 대한민국을 한동안 ‘검찰 공화국‘으로만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김기춘은 선발투수는 아니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구원 등판하여 노태우 정권을 지켜내는 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뉴스타파>의 보도에 의하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조작한 검사들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대선 캠프 주변에 몰려 있었다. 김기춘은 원로 그룹인 7인회의 일원이었고,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으로 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던 강신욱은 검찰 몫의 대법관을 지낸 뒤 2007년 박근혜 캠프의 법률지원 특보단장을 지냈고, 수사 검사였던 남기춘은 박근혜 캠프의 열린검중소 위원장, 수사 검사였던 윤석만은 박근혜 후보의 외가 조직인 대전희망포럼 공동대표였고, 수사 검사였던 곽상도는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첫 번째 민정수석이 되었다가 채동욱 검찰총장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밀려난 바 있다. 김기춘은이들 모두의 우두머리다. - P208

인권유린사건으로 뒤집은 신공은 이미 20년 전 초원복집 사건 때도 발휘되었다. 이 사건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지역감정을 부추긴 파렴치한 부정선거 모의가 아니라 불법적 반인륜적도청사건이 되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김기춘은 감옥에 가야 했고, 더 이상 공직을 맡을 수 없었어야 마땅하다. 부정 선거하기 좋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검찰은 초원복집에 모인 기관장들을 "공식 석상이아닌 사적 모임에서 나눈 대화를 가지고 처벌할 수는 없다"며무혐의 처분하고 모임을 주재한 김기춘 불구속 기소했다.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된 김기춘은 김영삼이 대통령에취임한 직후인 1993년 3월에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을 규정한 구(舊) 대통령 선거법 제36조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어 위헌"이라며 법원에 위헌제청을 신청했다.  - P211

법비法匪 김기춘은 19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0년과 2004년 선거에서 연거푸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시절 그가 가장 많은 플래시 세례를 받은 것은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가결된 뒤 헌법재판소에 탄핵안을 접수시킨 때였다. 당시 김기춘은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탄핵 소추의 검사 격이었는데, 법사위 여당 간사는 16대 국회에 제출된 친일 진상규명 법안에 대해 여야 간 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법사위에서단기필마로 법안을 누더기로 만들어버린 합천 출신의 김용균이었다.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한 것이 제명 사유가 된다는 지금이나 유신 시대와 비교한다면 대통령을 실제로 자르려고 했던 2004년의 탄핵은 절차 민주주의가 극한으로 만개한 것이 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이용해 탄핵안을 가결시키고 헌법재판소에 접수하러 간 자들은 친일과 유신과 공과 지역감정의 화신들이었다. 김기춘과 김용균이 탄핵안을 헌법재판소에 접수시키는 사진은 온 나라를 뒤흔든 탄핵 사태의 본질이과거 청산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였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 P212

꽤 오랫동안 미국은 한국에 작전지휘권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미군이 한국군 장성들, 특히 일부 일본군 출신 장성들의 지휘 능력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3군단장 유재흥이 중국군에 포위당했다고 지레 겁을 먹고 부하와 장비를 버린채 도망 오자당신도 군인이냐고 힐난하면서 그를 보직에서 해임했고, 한국군 지휘관에게 주요 부대의 지휘를 맡기지 않았다. 둘째, 미국은 이승만이나 박정희 같은 독재자들이 국내의 어려운 정치상황을 대북 군사 도발을 통해 모면하려는 불장난을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사실 이승만은 미국의 이런 우려를 적극 활용하여 미군을 붙들어 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정전협정에 끝내 서명하지 않았고, 반공포로 석방과 같은 초강수를 두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또라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잘 계산된 미친 짓이었다) 미군이 작전지휘권을 한국에 돌려주고 떠날 수 없도록 했다. 이승만이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고 작전지휘권을 환수하지 않은 것은 개인의 정권 유지에는 유리한 것이었는지 몰라도 남북 관계와 한미관계에는 두고두고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남북 관계에서 이북은 "어른들 얘기하는 데 애들은 끼어들지 말라"는 투로 대미 직접 교섭을 추구했다. - P223

만약 신민당 당수가 여전히중도통합론이나 읊고 있는 이철승이었다면, 양성우 시인이 "배고프고 예쁜 아가씨들"이라 부른 와이에이치(YH)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찾아가 농성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박정희의 죽음도 우리가 아는 형태로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김영삼은 한때 유신 정권이 버거워하던 야당 총재였다. 유신 정권의 호위병들은 그의 총재직을 박탈한 데 만족하지 않고 김영삼을 의회에서 제명하기까지 했다. 과연 안철수나 김한길이 박근혜 정권에 조금이라도 부담스러운 존재였을까?
안철수나 김한길이 ‘중도‘ 노선이 아니라 차라리 제대로 된
‘보수‘ 노선을 폈다면, 진보와 보수를 모두 아울러 지지세를 넓혔을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도 그런 사례가 딱 한 번 있다.
집권 초기의 김영삼이다. 금융실명제 실시나 육군 참모총장과보안 사령관의 전격 경질과 같은 하나회 척결 조치로 김영삼의 지지도는 90퍼센트를 넘었다. 서태지와아이들을 능가하는인기를 누렸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어설프게 부자들에게 아부하는 정책을 내세운다고 그들이 새정치민주연합을 지지하기나 할까? 내가 부자라면, 새누리당과 어설프게 입장바꾼 새정치민주연합 중 어디를 지지할까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 P240

 증거를 조작하여 억울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드는 정보기관을 개혁하는일이 과연 진보 세력만의 과제였을까? 대통령을 거북하게 했다는 이유로 검찰총장을 찍어내는 일을 중단하라고 촉구하는일이 과연 진보 세력만의 과제였을까? 세월호 참사를 보며 국가기관의 참담한 무능을 바로잡고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진상규명을 철저히 하는 일이 과연 진보 세력만의과제였을까? 이런 문제를 책임 있게 제기하고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고 안철수가 진보나 좌파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중대한 문제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결국 악의 편에서는 것이다. 안철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있었다. 싸우지 않는 것이 중도가 아니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비겁함과 무책임일 뿐이다. 안철수는 일찍이 없었던 ‘안철수 현상‘ 속에서 화려하게 정치에 입문했다. ‘안철수 현상‘은 안철수 개인에 대한 지지가아니었다. 그것은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촛불 시위와 두 대통령의 서거 등을 거치면서 진저리 날 정도의 무능을 보인 야당에 대한 거부였다. 안철수는 ‘새 정치‘를 입에 달고 다녔지만무엇을 위한 새 정치란 말인가? 정치에서 새로움 그 자체가 가치일 수는 없다. 안철수의 위기는 민주진영 전체의 위기가 되어버렸다. 양자 잘못 들여 종갓집 사당이 무너진 꼴이다. - P242

<삼국지>에서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먼 친척인 유표에게 얹혀 지낼 때의 일이다.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놀고먹던 유비가 어느 날 뒷간에 가서 보니 허벅지에 몰라보게 살이 쪘다.
늘 전쟁터에서 말을 타고 다니느라 허벅지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었는데 편안하게 세월만 죽이다 보니 살이 오른 것이다.
유비의 탄식을 비육지탄(비肉之嘆)이라 한다. 싸움의 근육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탄식이다. 이 뼈아픈 자각을 하고 나니 유비의 눈이 비로소 천리마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유비가 천리마를 얻은 곳이 하필이면 신야(新野)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새로운 야당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민주주의 시대에 정치인들에게 천리마는 시민이다. 지금 자기 등에 말안장 얹어주길 바라는 시민, 제대로 된 정치인에게 기꺼이 자기 등을 허락할 시민은 한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다. 10년 전을 돌아보라. 역사의 기회는 생각보다 자주 온다. 싸움의 의지를다지고 싸움의 근육을 회복할지어다. 신야를 달리는 천리마의 울음소리가 듣고 싶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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