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프랜시스의 미래상-휠체어에 앉은 오십대 사내의 모습-이 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연기 자욱한 방에 앉아 있는 그의 앞에는 내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한동안 내게, 우리가 예사 친구 사이가 아니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살아갈 친구라는 것만 생각해도 기분이 좋던 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버니가 죽은 직후에도 나를 위로해준 것은 오로지 이런 친구들의 존재였다. 그런데 그것이 역겨웠다. 출구 없는 방에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들과 너무 깊이 밀착해 있었다. - P295
줄리언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낭만적인 측면에서 과장하게 된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는 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그를 사랑했다. 내가 세상만사를 아름답게 윤색하고 싶다는 유혹, 세상만사를 다시 빚고 싶다는 유혹, 세상만사를 용서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낀 것은 바로 그와함께 있을 때였다. 내가 그런 유혹을 느꼈던 까닭은 줄리언 자신이 정감과지혜와 용기와 매력을 부여함으로써 끊임없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자기주위의 일상사를 다시 빚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사랑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은 물론, 내가 그 정반대의 극단으로 방향을 틀어 생각해보는 것도쉬운 일이다. 이제 나는 줄리언이 지닌 매력의 비밀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로 느끼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접근해 있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열등감을 우월감과 오만으로 바꾸어놓는 묘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타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에서 그런 교육을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충동을 성취하기 위해 그런 교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측면에 관한 한, 나는 어느 범위까지는 어느 정도 정확하게 체계를 세워 쓸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의 개성이 지니는 근본적인 마력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그를 처음 만날 때의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자 하는데, 이 까닭 역시 이로써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에게 그는 처음에 그랬듯이 지금도 골목어귀 같은 데서 불쑥 나타나 꿈을 이루고 싶으냐고 묻는 노현자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동화에서조차 귀에 솔깃한 질문을 던지는 친절한 노신사는 항상 우리의 꿈을 성취시켜주는 것만은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것은 내가 쉽게 용인할 수 있는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에서 이것은 나에게 진실이다. 이 대목에서 내가 독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한 짓을 낱낱이 고했을 때 줄리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라는 점이다. 이 대목에 나는 그가 이마를 책상에 대고, 버니를 위하여 울었고, 우리를 위하여 울었고, 기구한 운명, 낭비된 우리 모두의 인생을 저주하며 울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장님이나 다름없었던 자기 자신, 보지 않으려고 자꾸만 눈을 가리던 자기 자신을 위해 울었다고쓰고 싶다. 사실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그랬다고 쓰고 싶은 유혹은 버릴 수가 없다. - P370
‘줄리언은 겁쟁이야. 줄리언도 우리와 같은 입장에 처했더라면 우리가한 것과 똑같은 행동을 했을 거야.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줄리언이위선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줄리언은, 심지어는 버니의 죽음에 대해서도 스승으로서의 의무를 다한것 같지 않아, 만일에 스승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면, 그래서 우리를 증오하고 우리를 경찰에 넘겼다면 나는 줄리언을 용서할 수 있어.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어. 줄리언은 우리가 더 많은 사람을 죽었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거야. 줄리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살인사건에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 이름을 지우는 것이었어. 어젯밤에 만났을 때 줄리언이 나에게 한 말도 그것이었어." "어젯밤에 만났어?" "만났어. 나는 이 일이 줄리언에게는 자기의 정신적 평화를 해치는 사건에서 더도 덜도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어. 그렇다고 해서 경찰에 넘겨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아니지만, 줄리언은 우리를 경찰에 넘기는 문제를 놓고 적어도 갈등 정도는 했어야 했어. 그래야 자기 몫의 사명에 충실하는 것 아니겠어? 그러나 겁쟁이에게는 그런 갈등이 없어. 겁쟁이는 이렇게 도망쳐버리면 끝나는 것이니까." - P383
어릴 때, 별 이유도 없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던 일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내게도 비슷한 짓을 했지만 나는 그것이 성질머리가 나빠서 그러는줄을 알지 못하고 그저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거니 했다. 말하자면 그가 날조해내는 매질의 이유("너는 말이 너무 많아."라든지, "애비를 그따위 눈으로 보는 놈이 어디에 있어?")가 나름의 정당성을 지니는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머니를 매질하는 것(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동네 이웃들이 집을 증축하고 있다고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후에 아버지는 어머니가 자신을 돈을 못 버는 사람이라고 무시해서 화가 났다고 얘기했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을 본 어느 순간, 나는 아버지를 정의로운 법률의 제정자라고 보던 유치한 나의 생각이 전혀 틀린것임을 깨달았다. 어머니와 나는 그 지극히 편집증적이고 무식하고 매사에 무능한 사내에게 너무 목숨을 걸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한심한것은 우리 어머니에게는 그런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붙을 힘도 용기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때의 내 심정은 조종사와 부조종사가 술에 취해 조종실에 곯아떨어져 있는 비행기를 탄 기분이었다. 그날 그리스어 수업이 끝나고친구들과 함께 뤼케이온 앞에 서서 내가 했던 생각은, 열두 살 때 플래노에있는 우리 집 부엌에서 절망과 공포를 느끼면서 내가 하던 생각과 조금도다르지 않았다. 이 비행기는 누가 조종하고 있는 거지? 이 비행기는 누가 몰고 있는 거지? - P387
"안 돼, 헨리!" 커밀라가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그제야 헨리의 의도를 알았다. 헨리는 총구를 자기의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가 두번 났다. 총탄은 그의 왼쪽 관자놀이를 부수고 들어갔다. 두 번째 방아쇠를당기게 한 것은 권총의 반동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헨리가 입을 활짝 벌렸다. 열린 방문에서 불어 들어온 바람이 깨진 유리창 앞에 걸린 커튼을 바깥으로 날리다가 방충망에 부딪치면서 한숨 소리비슷한 소리를 냈다. 눈이 감기는가 싶더니 헨리의 무릎이 꺾였다. 헨리의몸은 바로 그 순간 카펫 위로 무너져 내렸다.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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