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을 까닭이 있어? 우리 할머니 우산인데."
커밀라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피를 빨면서 원망스러워하는 눈길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카밀라에게 주었다. 커밀라는 손수건을 폈다가 손가락에다 돌려 감았다. (펄럭이는 하얀 손수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 어둑어둑한 하늘 문득 시간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기억의 한 자락이 비수처럼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그랬듯이 하늘은 금방이라도빗줄기를 쏟을 듯이 컴컴했다. 나뭇잎도 그때처럼 푸릇푸릇했다. 커밀라의입가로 흘러내린 몇 올의 갈색 머리카락까지 똑같았다.
(펄럭이는 하얀 손수건)
(•••••• 그 골짜기. 커밀라는 헨리를 따라 골짜기 아래로 내려갔다가 헨리보다 먼저 올라왔다. 우리는 벼랑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커밀라의 머리카락을 휘젓고 있었다. "죽었어?" 우리가 물었다. 커밀라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손에 묻은 진흙을 닦았다. 커밀라는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컴컴한 하늘을 배경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커밀라의 표정은 비어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감정의 앙금도 투사되지 않고 있었다.) - P228

운구 요원들은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코러스들처럼 관 뒤에 우중충하게서 있었다. 헨리가 그중에서 가장 젊었다. 헨리는 손을 모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크고 하얀 손, 책상물림의 손, 잘 가꾸어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손, 우리가 골짜기 위의 벼랑에 가만히 선 채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을 동안, 버니의 목에서 급소를 찾아내고 그 급소에 박혔던 손, 버니의 목을 앞뒤로 젖혀 기어이 목뼈를 부러뜨려놓고 말던 손.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는데도우리 눈에는 비틀린 버니의 목, 앞뒤가 바뀐 발, 버니의 입과 코에서 흐르는 피가 보였다. 헨리는, 뒤틀린 채 버니의 머리 위로 올라가 버린 안경에는 손을 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가만히 눈꺼풀을 내려주었다. 버니의 다리 하나가 경련하다가 그대로 굳었다. 커밀라의 시계에는 초침이 있었다. 우리는 시간을 재는 헨리와 커밀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밀라의 뒤를 따라 올라오면서 헨리는 손으로 무릎에 묻은 흙을 털고, 그 손은 바지에 닦았다. 그때 우리가 물었다. 죽었어? 그는 의사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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