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님은 나와 형님의 이름을 착각했을 뿐이지만,
아까 하신 말씀이 딱히 틀린 건 아니에요. 할아버님은 이 집에서 일어난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고, 범인이 누군지 알고있습니다."
사토코는 2층을 올려다보려던 시선을 다시 떨구며 다케히코의 얼굴을 보았다. 그 시선은 어중간하게 숙여진 채 문득 멈춰버렸다. 다케히코의 얼굴에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없는 기묘한 미소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아까 할아버님이 빨리 경찰서에 자수하러 가라고 하신 말씀은 류스케 형님이 아니라 나한테 하신 말이었어요."
그리고 그 미소를 그대로 지은 채 이렇게 말했다.
"경찰서에 가서 모두 다 말하기 전에 처형에게 먼저 고백하고 싶었어요. 그날 내가 나오코를 죽였다는 것을." - P166

실제로 내 몸은 모피가 타는 듯한 냄새를 풍겨서 나는 죄라는 건 이런 냄새가 나는 것이구나, 하고 나 스스로도 그 악취에 얼굴을 찡그렸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런데도 그 거무칙칙한 악취는 어쩐지 그 자리에 생뚱맞게 튀어나온 것인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기보다 피식 웃은것 같습니다. 적어도 나오코의 눈에는 내가 평소처럼 미소를 지은 것으로 보였겠지요…. 바로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나를 보고 그리 놀라지도 않고, 무슨 큼직한 봉제 인형을 만난 것처럼 내게 빙긋이 미소를 건넸습니다.
봉제 인형?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건 봉제 인형이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이제야 겨우 알겠군요. 그때 일은 노출오버 사진처럼 모든 것이 여름 한낮의 하얀 빛에 녹아들어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지금껏 분명하게 생각나지 않았는데, 이제야 겨우 깨달았습니다. 그건 봉제 인형이었습니다. - P168

나와 유키코, 그리고 처형 부부의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 범죄 비슷한 것이었고 그 중요한 증거품을 일부러 내 눈 앞에 들이대는 것 같았습니다. 나오코라는 존재는, 단순한 게임 같은 어처구니없는 어른들의 사랑 드라마를 심각한 범죄로 바꿔버린다는 것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역시 류스케 씨의 아이구나... 그런 실감이 들었습니다.
신주쿠 산초메 사거리에 내던지고 왔을 터인 고통이 갑작스레다시 큰 의미를 품고 나를 덮쳤습니다.
내 아이가 아니라 류스케 씨의 아이다. 게다가 나오코는 그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류스케 이모부의 딸이고, 이곳이 진짜 자신의 집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키코가 슬쩍 알려주었는지, 아니면 어린아이의 예리한 후각이 본능적으로 진짜 아버지의 냄새를 맡았는지, 아무튼 이 아이는 알고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 앞에서나 집에서는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이런 너부죽한 자세로 엎드려 있을 리 없다…. 나오코는 스케치북에 얼굴을 파묻듯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느라 내가 다가온 것도 알지못한 것 같았습니다.
"나오코 뭘 그리고 있어?"
내가 말을 건네자 나오코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나는 나오코의 머리 바로 옆에 뻣뻣이 서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내 다리밖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지요.
 그대로 새우처럼 작은 몸을 뒤로 젖혀 그 아이의 시선은 미끄러지듯이 내 얼굴로 올라왔습니다. 그 나긋나긋한 몸의 움직임을 보며 호텔 침대에서 밀회 중인 유키코를 떠올렸습니다. 나를 타인처럼 올려다보는 무표정한 눈도 평소의유키코를 닮았습니다. 그리고 표정 없이 윤곽선만 그려놓은초상화 같은 나오코의 얼굴은 심플한 그만큼 류스케 씨와똑같은 얼굴을, 범죄의 또 하나의 증거를 분명하게 내 눈앞에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오코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지그시 내려다보는 남자가 누구인지 겨우 알아봤는지, 놀라움과 동시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부르짖었습니다.
"아저씨!"라고.
그것이 어른들의 범죄와도 같은 사랑 게임의 세 번째 크나큰 증거였습니다. - P177

자꾸 꽃 넝쿨로 목을 매려다가 나동그라져 죽지 못하고웃음소리를 올리는 노인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나오코의 죽음까지 그리 슬픈 사건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지난 이 년 동안 노인의 괴상한 말과 행동을 혼자 감당하면서 사토코는 신경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도무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피로감을 느껴왔지만 왠지 이 순간, 사토코는 처음으로 이 노인네는 미친 게 아니라고 느껴졌다. 오히려 이 노인네만 정상이고, 미친 건 우리 쪽이다. 나를 포함해 죽음을 잔혹하고 슬픈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미친 것이다….
그렇게 느껴질 만큼 그때 정원 안에는 낙원처럼 아름답고 선하고 온화한 것이 있었다. 여름을 몰아내는 가을바람같은 조용하고 적막한 바람이 불어와 꽃도 노인의 웃는 얼굴도 투명한 바람의 흐름 속에 둥둥 떠돌며 빛났다가 그늘지고 그늘졌다가 다시 빛나면서 자연의 추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부터 한 달여 동안이 집 안에는 추악한 현실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노인의 머릿속에만은 이런 낙원과도 같은 꿈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 노인의 머릿속에는 무시무시한 전쟁터가 있어서 그는 끝없이 반복되는 잔인한 살육의 망상에 고통을 받아왔을 터였다. 바로 한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다케히코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수하러 간 것처럼 이 노인도 이제야 겨우 망상의 전쟁터에서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끝에 이 깨달음과도 같은 낙원의 세계에서 노닐고 있는 게 아닐까. - P186

"애, 사토코, 이번에 살해된 여자애는 저기 서 있는 저여자와 나 사이에 생긴 아이야. 그런데 실은 저 여자가 딴 남자하고 만든 아이야 나도 그렇고 다들 저 여자의 속임수에 감쪽같이 넘어갔어."
참으로 엉뚱한 말이었다. 사토코는 분명하게 알아보면서 유키코는 자신의 전처로 혼동하고 있었다. 전처의 배신이 이 노인에게는 그토록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리라.
일주일 전의 사건과 전처의 부정이 노인의 뒤엉킨 머릿속에서 군데군데 끊긴 채 하나로 이어지면서 전기 합선처럼 불꽃이 튄 결과가 방금 내뱉은 말로 나타난 게 아닐까.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지만, 생각해보니 웃을 일이아니었다. 시아버지가 나오코를 전처가 딴 남자에게서 낳아온 아이라고 착각했고, 그 바람에 살해했을 가능성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노인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토코는 짐짓 나무랐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님, 나오코는 유키코와 다케히코의 아이예요."
분명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유키코를 향해 "나를 보면서도 이따금 세상 떠난 시어머니로 착각을 하시니까 네가 너그럽게 용서해"라고 말했다. 딱히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유키코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파르르 떨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노인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상처를 입은 건가..….
"어린애 농담 같은 거라니까. 그렇게 정색을 하고 받아들일 것도 없는.…."
하지만 유키코는 그 말을 가로막으며 비명 같은 소리를올렸다.
"언니...!"
그 목소리도 눈빛도 언니를 비난하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아니라 사토코에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왜 그래,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어?"
웃으면서 되물은 순간, 사토코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자신의 실수를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유키코는 여전히 겁에 질린 눈빛으로 언니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어붙은 듯 새파래진 관자놀이에서 밀랍 같은 땀이 툭 떨어지는 것을 사토코는 여동생보다 훨씬 더 차가운 눈빛으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 P100

조금 전에 다케히코가 털어놓고 간 얘기들이 가슴속에충격의 잔향으로 엉겨 있었다.
충격을 받은 건 다케히코가 한 고백의 내용보다 그의 거짓말이 너무도 교묘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특히 사건 당일의 행동에 관한 한, 다케히코가 한 얘기는 모두 다 거짓말이었다.
다케히코는 그날 나오코를 죽이지도 않았고, 나오코가 살해된 시간에 이 집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토록 교묘한 거짓말로 자신을 범인으로 만들었다.
다케히코는 범인이 되고 싶어 했을 뿐이다. 왜 범인이되려 하는지도, 왜 경찰에 가기 전에 이 집에 왔는지도, 사토코는 잘 알고 있었다.
범인은 따로 있다•••. - P192

그때 나오코의 몸을 안고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까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나?"
그러자 아버지는 또렷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응, 그 여자가 나한테 부탁했던 게 생각나서 내가 그 아이를 죽였어. 몸을 배배 꼬는 그 못된 여자... 내 전처를 닮은그 여자... 가끔 우리 집에 왔었지? 오늘 아침에도 왔었어. 전부터 그 여자가 나한테 그 아이를 죽이라고 말했어. 류스케,
누구냐, 그 여자?" - P247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내가 그 아이를 죽인 이유는뻔히 다 알잖아. 네가 바로 그 여자니까!"
한순간 할아버지가 나와 형부의 불륜을 눈치채고 똑같은 실수를 범한 나와 전처를 혼동한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물론 그건 나의 지레짐작이었다. 게다가 그 바로 뒤에 할아버지는 주먹으로 바로 옆의 탁자를 쾅 내리쳤다.
"그 애가 아직 살아 있다면 내가 죽여야 해. 그 애는 섬에서 죽었으니까 살아 있으면 안 돼!"
목청을 쥐어짜듯이 그런 말을 부르짖었다. 그 손아귀의 힘은 탁자를 부수기 전에 자신의 손을 부술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주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나와 형부의 관계에 숨은 잔혹한 일면을목격한 듯한 마음이 들었다. 단지 쾌락만을 탐했을 뿐, 우리둘의 관계 속에 누군가 이런 식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릴 만큼큰 죄가 숨어 있다는 것 따위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나는정원으로 시선을 옮겨 여름 하루의 마지막 햇빛에 달궈져 부옇게 흐려진 작은 여자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할아버지가 몇 번이나 "죽여야 해. 내가 저 아이를 죽여야 해"라고 내뱉었을 때, 불쑥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라고 말해버렸다.
"네, 그렇게 하시라구요. 그래야 속이 풀리신다면 하셔야죠. 근데 오늘은 안 돼요. 나중에 다른 날에 하세요."
물론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나는 얼굴에 웃음마저띠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달래려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갑작스레 분노가 진정되어 깊은 안도감에 휩싸인 얼굴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었다•••. - P257

혹시 히라타가 자신의 입을 나오코에게 대고 있었다면 그건 숨이 멈춰버린 나오코에게 인공호흡을 해주려고 한 것이다. 그 아이를 죽인 건 할아버지다. 히라타는 그 집에 갔다가 덜컥 현장을목격했고, 순간적으로 인공호흡을 해주려고 했을 뿐이다.
분명 일이 그렇게 된 것이다. 머리가 나쁜 나도 간단히 알 수있는데 류스케는 이번에도 자기 멋대로, 자기 편리한 대로사실을 왜곡했다. 그다음 일도 나는 간단히 알 수 있다. 히라타의 착한 구조 노력 덕분에 나오코는 숨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도 류스케는 엉뚱한 오해를 했다. 나오코가 축 늘어진 것만 보고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땅에 묻어버린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오코가 숨이 돌아온 것은 땅에 묻힌 다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먼저였던 히라타가 애써구해낸 나오코의 목숨을 다시금 매장해버린 건 류스케다.
그 정원은 흙이 바짝 말라서 모래 같은 상태였으니까 땅에 묻었다고 해봤자 푸석푸석한 흙을 덮어둔 정도였을 것이다. 나오코의 손끝이 밖으로 나온 것은 그 아이가 아직 살아있었다는 증거다. 나오코는... 그 아이는..… 되살아난 그 희미한 목숨으로 마지막에 지상으로 손을 내밀어 그날 오후 정원에 가득하던 하얀 빛을 잡으려고 했다•••. - P262

‘아, 그렇구나, 아버님이 나오코를 공격하게 만들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거야.‘
처음에는 나오코를 살짝 다치게 하는 정도로만 하려고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버님을 요양 시설에 보내기가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유키코가 나오코를 데려간 바로 뒤에 나는 아버님에게 말했다.
"그 아이가 그토록 눈에 거슬리면 아버님 손으로 어떻게 좀 해주세요. 저도 정말 짜증이 나네요."
그저 잠깐 농담으로 한 얘기였다. 웃기까지 했다. 그랬는데 시아버지가 왠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내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시아버지의 눈빛은 여느때처럼 텅 빈 것이 아니었다. 내 웃음의 이면에 숨어 있는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한 사악한 것까지 알고 있는 듯한 느힘이 들었다. 물론 나는 곧바로 이성을 되찾아 농담으로라도 그런 잔인한 말을 한 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지만, 그이성도 돌연 몸속 어딘가에서 태풍처럼 끓어오르는 짜증에 어이없을 만큼 간단히 날아가버렸다.
그다음 주 목요일에 유키코가 나오코를 데려왔을 때도나는 은밀히 할아버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저 아이 때문에 정말 짜증 나요."
그렇게 일주일 동안 거의 매일같이, 둘만 있을 때를 노려 똑같은 말을 시아버지의 부서져가는 조개껍데기 같은 귀에 속닥거렸다.
"저 아이 때문에 짜증 나요. 다음에 왔을 때 어떻게 좀 해주세요."
그런 말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사실은 "아버님 때문에 짜증 나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하게 "저 아이 엄마 때문에 진짜 짜증나요"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P272

사건이 터진 그 목요일까지, 일주일 내내 최고기온이 갱신될 만큼 무더운 날씨였다. 여름 햇빛은 자신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썩어 문드러져 집과 정원에 하얀 단내를 쏟아냈다. - P275

 그 아이가 류스케의 자식이라는 것을 아직알지 못했지만, 그냥 그 아이가 가요보다 예쁘고 얌전하고유키코를 꼭 닮은 화려함을 안에 감추고 있는 것을 용서할수 없었다. 그 아이가 곁에 있으면 모두가 가요 따위는 무시하고 그 아이만 예쁘다고 추켜세웠다. 마치 어렸을 때의 유키코처럼….
그날 아침, 가요가 "나오코는 치과에 데려가지 말자"라고 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가요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오코와 함께 가면 치과 선생님도,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나오코만 예쁘다고 하고 자신은 무시한다는 것을 그건 사토코가 어린 시절에 유키코만 예쁘다고 칭찬하던 어른들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그래서 아버님에게 "저 아이를 어떻게 좀 해주세요"라고 계속 속닥거렸고, 그날은 아버님이 정말로 어떻게든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가요가 "나오코는 치과에 데려가지 말자"라고 했을 때 "그럴까?"라고 대답했다 •••. 유키코를 미워하듯이 나는 그 아이를 미워했다. 그래서 죽였다. 그 이유만으로 죽였다 •••. - P280

그리고 흙 속에서... 푸슬푸슬한 흙 속에서 얼굴 모양 같은 것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이 흙으로 사람얼굴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그건 조금씩, 조금씩, 얼굴이 되었다. 입이, 코가, 잠든 것처럼 꼭 감은 눈이 만들어졌다. 흙의 입이 괴로운 듯 움찔거렸다. 흙을 빨아들이면서 그 애는 열심히 숨을 쉬고 있었다... 좀 힘들긴 하지만, 절대로 어느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완벽한 숨을 곳을 그 애는 찾아낸것이다.
얕은 흙에 덮여 그 애는 눈을 감고 있을 텐데도 흙 속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내가 술래인데 그 애가 술래가 되어 나를 찾아냈다고 신이 난 것 같아서 정말 무서웠다. 그래서 그 흙 위에 올라섰다. 나는 그 위에 서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발밑의 흙은 금세 조용해졌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엄마하고 그 아이를 찾는 척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지쳐버렸을 때, 할아버지가 무슨 이상한 말을 했고 다케히코 이모부도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아서 내가 말해줬다.
"엄마, 아까 치과에 갈 때는 저기에 삽이 없었어."
내 말에 대답하듯이 뭔가 어려운 이름의 나뭇가지에서 오렌지색 꽃송이 하나가 뚝 떨어졌다.
그 애의 몸은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금세 찾아냈다.
하지만... 진짜 숨바꼭질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 P282

이 년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나는 치매에 걸린척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이 집에 이따금 찾아오는 여자애를 살해하라는 그 계획 때문이었다…. 아내 아키요가 세상을 떠나기 이 년 전, 며느리의 여동생이 아이를 낳는 것과 동시에 이 집안은 폭탄을 떠안은 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든 그 폭탄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 아이가 제 엄마를 따라 진짜 내 집은 여기라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자주 드나들자 아키요는 불단 안에서 "괜찮아, 죽여도 괜찮아"라고 자꾸만 속닥거렸다. 명령과도 같은 그 목소리는 어느새 나 자신의 목소리가 되고, 그 아이를 죽이는ㅊ일은 내 계획이 되었다. - P303

"괜찮아."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키요의 목소리가 아니라 눈앞의 소녀가 그렇게 중얼거린 것이다.
한 여자가 있었다.
내 눈앞에 네 살짜리 한 여자애가 있었고, 스스로 이 범죄의 진짜 범인이 되려 하고 있었다.
"죽여도 괜찮아.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내가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응, 엄마가 아까 전화했어. 할아버지가 나를 싫어해서 무서운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도망치라고…. 근데 괜찮아,
죽여도."
"죽인다는 게 뭔지 알아?"
"아니. 근데 괜찮아,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래서 할아버지가 힘들지 않게 된다면.... 할아버지, 힘들지? 얼굴이 힘들어보여."
아니, 나는 환상의 목소리를 듣고,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네 살짜리 어린아이가 그런 말을 할리가 없다. 하얀 빛에 불타서 나는 또 다시 나 자신을 잃었다.
단지 내 손만이 먼 옛날의 죄를 기억하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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