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가 패배한 소식을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우드의 표현을 빌면 "케네디가에서 선거에서 진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손을 부들부들 떨거나 비통해하는 모습이 없었기때문이다. (최종집계에 따르면 케네디는 6퍼센트 차이로 졌다. 총 27개 예비선거와 본전을 연속으로 승리한 케네디 가문의 기록이 끝난 것이다.) 누군가 오리건의 패배가 보좌관들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케네디가 말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제가 이겼으면 저 때문에 이겼다고했을 텐데, 그럼 진 것도 저 때문에 진 거죠." 케네디는 자리를 피하는 대신 기자들과 함께 앉아서 패배한 이유를짐작해봤다. "때론 제가 미국의 분위기를 제대로 감지한 건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제대로 감지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완전히 틀렸을 수도 있죠. 어쩌면 사람들이 변화를 싫어하는 건지도 몰라요." 케네디는 매카시를 과소평가한 점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저를 너무 싫어해서 저를 막으려는 게 아닌가 싶기도..…." 케네디는 말을 끝내지 않고 끝을 흐렸다. 헤이즈 고리가 케네디에게 캘리포니아 선거전략을 바꾸겠느냐고 물었다. "아뇨. 제가 믿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걸 계속 밀고 나갈 겁니다. 미국의 분위기를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 P368
형 JFK는 철로 주변에 모인 수백 명을 상대로 연설했지만, 바비 케네디의 연설을 들으러 온 사람은 수천 명에 달했다. JFK는 구름이 낀 평일에 들렀지만, 바비 케네디가 방문한 날은 해가 쨍쨍한 현충일 휴일이었다. JFK가 준비한 연설은 다소 차갑고 형식적이었다. 사람들이 JFK에게 선물로 주어서 열차 칸에 쌓인 과일과 채소는 아주 낮은 임금을 받으며 힘겨운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직접 밭에서 따온 것이었지만 JFK는그런 사실을 모르거나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JFK는 청중에게 더 나은 노동조건을 약속하는 대신 냉전 승리를 약속했고, 모데스토에서는미국이 "전 세계 자유에 대한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고 했으며, 머세드에서는 "미국이 콜럼비아와 콩고,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세자르 차베스가 1960년 선거 당시 JFK를 지지한 치카노보다 50배나 많은 사람이 1968년 선거에서 바비 케네디를지지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P386
케네디는 생애 마지막 며칠 동안 더욱 목표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케네디가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얼굴에 난 주름은 깊어졌고, 눈은 푹 꺼지고빨갛게 충혈되었다. 말을 더듬고 생각의 끈을 놓쳤다. 손이 낮에는 떨렸고 밤에는 피가 났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기아와 가난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몸이 떨렸다. 이 기간에 리처드 하우드 <워싱턴포스트> 기자는 편집장에게 "그사람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며 케네디 선거운동 취재에서 빼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결정에 하우드는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케네디 전담 기자단)가 갈수록 편파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치어리더가 된 건 아니지만 그럴 위험에 처했죠." - P401
대개 선거 당일 저녁에는 호텔의 연회장에 지지자들이 모이고, 스위트룸은 친구와 선거캠프 직원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이 모여서 후보와 이야기하고 함께 축하하거나 최소한 후보와 같이 있고 싶어 하지만, 케네디는 그날 저녁만큼은 그런 떠들썩한 모임을 생략하기로 했다. 지난 몇 달간 친구들과 모르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 저녁은 말리부에서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선거결과를 지켜보고 싶었다. 그래서 TV 방송사에 취재 장비를 프랭컨하이머의 집으로 보내 달라고 했지만 방송사는 취재진과 기술진을 이미 앰배서더 호텔로 보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케네디는 어쩔 수 없이 저녁 식사를 앞당겨서 한 후 프랭컨하이머가 운전하는 차로 호텔로 향했다. 케네디는 처음에는 이미 늦어서 프랭컨하이머에게 속도를 내자고 했지만, 프랭컨하이머가 고속도로 나들목을 놓치자 이렇게 말했다. "존, 그냥 천천히 가요. 인생은 아주 짧아요." - P407
그러고는 슐버그의 충고대로 "흑인 사회에 있는 제 친구들 모두"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한 세자르 차베스와 돌로레스 후에르타를 언급하며 "선거운동 중에 우리가 이야기한 동료 시민에 대해 의무와 책임이"있다면서, 대통령이 되면 책무를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지막으로 에설의 옆에 서서 활짝 웃으면서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우리 모두 (전당대회가 열리는) 시카고에서 승리합시다"라고 말했다. 케네디의 이 말은 공식 석상에서 한 마지막 발언이고, 승리의 순간을 너무나 완벽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이후 여러 날 동안 방송을 탔고 1960년대를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에도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 P416
빌 배리는 케네디가 강당을 관통해서 나갈 것으로 생각해서 먼저사람들 사이로 이동하면서 케네디가 통과할 길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케네디가 주방 창고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쫓아갔다. 케네디가 왜 그쪽으로 가기로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흥분한 청중 때문에 놀라고 불안했을 수도 있고, 지난 82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치인 탓에 지쳐서 그랬을 수도, 혹은 콜로니얼실에서 예정된 인쇄 매체기자들과의 회견을 서둘러 가진 후 팩토리 디스코텍에서 열릴 축하파티에 가려고 했을 수도 있다. 훗날 더턴은 케네디가 예정에 없이 주방을 통과해서 이동하기로 한 것을 막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항상 제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케네디는 주방 쪽으로 걸어가다가 전미자동차노조의 지역위원장이자 자신을 일찍부터 지지해온 폴 슈레이드를 발견하고는 "폴, 제스와 함께 저 좀 봐요"라고 말했다. 슈레이드는 케네디가 기자회견이 예정된 콜로니얼실로 같이 가자는 말로 이해하고 뒤따라가며 이렇게 생각했다. ‘여때껏 싸워온 게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야. 드디어 우리가 원하는대통령을 얻게 되었어.‘ 케네디가 주방 창고의 작업대 위로 손을 뻗어서 주방에서 일하던 사람과 악수를 하려던 순간, 성과 이름이 똑같이 시르한 시르한이라는젊은 팔레스타인계 남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 권총을 케네디의 머리를 향해 쏘았다. (시르한 시르한은 미국에서 12년을 거주한 24세의 팔레스타인 남성으로, 암살을 저지른 후 40년 넘게 캘리포니아의 형무소에서 형을 살고 있다. 케네디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죽였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죽였어야 할 대선 후보가 한둘이 아니었다. 영화 <맨츄리안 캔디데이트>의 시나리오처럼 마피아나, CIA,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에 의해 세뇌되어 범행을 저질렀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유명인을 죽여서 자신도 유명해지고 싶었던 정신장애를 가진 청년이었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 P417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케네디 본인을 포함해 아무도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헤이즈 고리는또렷한 정신으로, "로버트 케네디가 바닥에 누워서 위를 바라보며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절대 잊지 못할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어요"라고 했다. 피트 해밀기자는 바닥에 누워있는 케네디의 얼굴에서 "상황을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표정이 스치는 것을 봤다. 항상 그랬듯 케네디는 눈으로 말했다. 그의 눈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가 아니라, "이렇게 끝이 나는군"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 P421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임기 말기에 아서 슐레진저는 『로버트 케네디 Robert Kennedy』라는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20세기로 들어오면서, 그리고 1930년대와 1960년에 그랬던 것처럼, 머지않아 댐이 무너질 것이다. 그 주기가 지켜진다면 1990년쯤에 미국인의 삶에 새롭고 자애로운 시대를 향한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기대할 수 있다. 그때가 오면 로버트 케네디의 이상은 더 이상 낯설게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댐은 아직도 터지지 않았다. 어쩌면 댐을 붙들고 있는 안일함, 이기심, 냉소주의가 너무나 단단해서 무너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무너지는 날이 오게 된다면 로버트 케네디의 이상과 그의 선거운동은 불현듯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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